@
 
홈 > 역사교실


  
全琫準將軍 出生地에 대한 考察
 관리자  09-08 | VIEW : 2,681
           全琫準將軍 出生地에 대한 考察

{天安全氏丙戌世譜}를 통해서 본 全琫準將軍 家系와 高敞 堂村 出生說  

송정수(전북대 사회교육과)  
   1. 머리말  
   2. 전봉준 장군 출생지에 대한 제설  
   3. {丙戌世譜}를 통해서 본 전봉준 장군의 가계와 출생지  
   4. {丙戌世譜}를 통해 확인되는 몇가지 사항  
   5. 맺음말  
  

    1. 머리말  

  1894년에 일어난 東學農民革命이 한국 近代史上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러한 중요성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1) 그렇지만 이 사건을 배태시킨 시대적 상황의 복합성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일치된 見解를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새로운 문제점도 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풀어야 할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고 할 것이며, 앞으로도 多角的이고 深度있는 검토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있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새로운 史實들을 보다 많이 발굴해야 한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고 지금까지 적지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마다 자료의 零細性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 자료발굴에 대한 관심도 보다 적극적으로 기우려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全琫準 將軍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에 비해 그의 行蹟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그의 供草記錄이나 그외 몇몇 資料 및 口傳에 의존하여 기술될 따름이며, 그 때문에 많은 부분이 여전히 공백과 의문으로 남아있다.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자료가 이처럼 인멸되어 영세한 것은 그간 이 사건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세기 말 桎梏된 우리나라의 역사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본인은 근년에 새로 발굴된 丙戌年(1886년)에 간행된 {天安全氏世譜}2)를 통해 전봉준 장군의 家系를 검토한 바 있다.3) 여기에서 전봉준 장군과 全炳鎬라는 인물의 同一人 여부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전봉준 장군의 가계를 재구성해 보았으며, 또한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와 그의 행적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물론 이를 확언할만한 명확한 자료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피력한 본인 나름대로의 心證은 아직도 변함이 없으며, 또한 여러 연구서에서도 이 내용이 소개되고 신빙성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새로운 많은 증언과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보다 명확한 해명이 기대되는 바이며, 이러한 기대를 가지면서 본인은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를 중심으로 기존의 諸說과 본인이 그간 살펴 본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2. 全琫準 將軍 出生地에 대한 諸說  

  전봉준 장군은 1855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여러 많은 異說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는 역사적 중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전봉준 장군의 유동적인 생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 제기된 전봉준 장군 출생에 관한 제설들을 살펴보면, 井邑縣 梨坪面(당시 古阜郡 宮東面) 長內里 鳥巢마을이라는 설, 全州 태생이라는 설, 井邑縣 山外面東谷里 知琴谷(지금실)이라는 설, 井邑縣 德川面 柿木里(감냉기)라는 설, 그리고 高敞縣 德井面竹林里 堂村 태생설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설에 대해 이미 여러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 검토된 바 있지만 다시 정리하면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정읍군 이평면(당시 고부군 궁동면) 장내리 조소마을이라는 설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당시 전봉준 장군이 이 곳에 살았던 것을 바탕으로 일찍이 金庠基 선생이 주장한 것이며,4)  한 때 이곳 출생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곳에는 전봉준 장군의 舊居가 지방문화재 19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현존하고 있지만 1974년에 보수될 당시 '戊寅(1818, 1878) 2월 26일'이라는 干支가 적혀 있는 上樑文이 나왔거니와 전봉준은 공초에서 농민혁명으로 고부의 집이 모두 불에 탔다고 말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張奉善은 「全琫準 實記」에서 전봉준이 泰仁縣 甘山面 桂峰里(현 정읍군 甘谷面 桂龍里)에서 고부군 궁동면 陽橋里로 移居하였다고 하고 있으며5), 邕京源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 양교리에서 다시 조소리로 이사하였다고 한다.6) 이로 미루어 보건대 조소마을은 이후 거처한 곳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곳 출생설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전주태생설은 장봉선이 주장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은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이다.7) 이에 대해서 일찍이 金義煥은 훗날 전주 인사들이 전봉준 장군을 崇慕하여 꾸며낸 설이라 하고 있지만8), 전주는 전봉준 장군이 한 때 '龜尾聖人出(구미에서 성인이 나온다)'이라는 참위설에 따라 후에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金開南, 宋熹玉과 함께 잠시 全州郡 鳳翔面 龜尾里에 移住하여 머문 곳9)으로 전연 연고가 없던 곳은 아니며, 전주 태생설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연고와 관련해서 전봉준이 태인현 감산면 계봉리에 살 때 전주에서 이사해 왔다고 하여 전주출신으로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10) 아무튼 전주 태생설도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이라는 설은 崔玄植의 주장으로11) 이는 전봉준 장군이 訊問을 받을 당시 주소를 이 곳으로 대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실이라는 곳은 전봉준의 마지막 거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곳이 그의 生家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강하며12), 최현식 역시도 이후 泰仁 甘山에서 18세 때쯤 이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라고 수정을 하고 있음을 보면13) 이곳 역시도 출생지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정읍군 덕천면 시목리라는 설은 邕京源의 증언을 바탕으로 신복룡교수가 제시한 설이다.14) 옹경원은 그의 할아버지인 邕宅奎로부터 전봉준 장군이 시목리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는 것이며, 옹택규는 당시 정읍에서 손꼽히는 문장가였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전봉준과도 친숙한 사이라는 점에서 이 주장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 교수는 이후 그의 연구에서 감냉기 역시도 한 때 거처했을 가능성이 많으며, 출생지는 아니었다고 수정을 하고 있다.15)  
  마지막으로 고창현 덕정면 죽림리 당촌태생설은 일찍이 『東學史』를 쓴 吳知泳이 주장하였다.16) 이에 대해서 김의환은 정확한 고증은 후일로 미루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곳 당촌에는 天安 全氏 20여 戶가 모여 살았고 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두목들이 이곳에서 많이 배출되었다는 村老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봉준과 밀접한 연고가 있는 곳이라 하여 어느 정도 긍정을 한 바가 있다.17) 또한 정읍군 산외면 동곡 태생을 주장했던 최현식도 이후 전봉준 先代의 世居地가 고창군 新林面 碧松里였고, 先代의 墓가 모두 벽송리 承判洞에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종래의 주장을 바꾸어 전봉준의 당촌태생이 정설로 인정된다고 하였거니와18) 이 설은 기존의 여타의 설이 많은 의문점을 가진데 비해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한편 지금도 당촌에 가면 전봉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의 터를 확인할 수 있고, 마을 입구에는 그의 부친이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서당도 찾을 수 있다는 증언도 있거니와19) 특히, 근년에는 『丙戌世譜』가 세상에 빛을 보게되면서 이 내용을 통한 전봉준 장군의 고창 당촌 태생설은 더욱 신빙성을 얻어가고 있으며, 정읍군 덕천면 시목리 출생설을 주장했던 신복룡 교수도 근자에는 이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20)  
  
    3. 『丙戌世譜』를 통해서 본 全琫準 將軍의 家系와 出生地  

  『丙戌世譜』를 통해 전봉준 장군의 고창 당촌 태생을 처음 주장한 것은 李起華 선생이다. 그는 堂村 일대의 口傳과 『丙戌世譜』, 그리고 先代와 형제들의 묘소를 추적하여 이 설을 새롭게 주창하여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21) 물론 본인도 이 주장에 대해서 수긍할 뿐만 아니라 적극 찬동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위의 주장은 『丙戌世譜』에 있는 全炳鎬라는 인물이 전봉준 장군과 동일 인물이라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기정 사실화하여 주장하고 있다.  또한 천안 전씨 문중에서는 『丙戌世譜』를 바탕으로 1986년(庚戌年)에 『天安全氏大同譜』22)를 간행하면서 전병호라는 인물을 전봉준 장군과 동일 인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 역시 두 인물이 同一人이라는 어떠한 설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이 잘못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에 본인은 위 주장이 보다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두 인물의 동일인 여부에 대한 해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새로 간행된 『大同譜』의 誤記를 바로 잡을 필요성에서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검토를 한 바 있고, 또한 이를 토대로 전봉준 장군의 가계에 대해 재구성해 보았다.  
  기왕의 연구에서 본인은 두 인물의 출생연도가 1855년으로 같고, 礪山 宋氏家의 女息과 혼인을 하며, 前妻와 死別을 한 후 李氏를 후실로 맞아들이는 등 처가의 여러 정황이 일치하거니와, 출생지 및 여타의 행적에서도 동일인임을 검토하였다.23) 물론 이러한 정황만으로 동일인임을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丙戌世譜』를 지니고 있던 全聖泰씨의 확고한 증언과 철저하게 정황증거가 인멸된 인물에 대한 이만한 방증이고 보면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또한 신복룡 교수가 지적한 『天安全氏世譜辛未譜』(1931년 刊)에 전봉준의 號가 『丙戌世譜』에 있는 전병호의 號인 鐵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24) 두 인물이 동일인일 가능성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두 인물이 동일인임을 상정해서 『丙戌世譜』와 이후 이를 토대로 해서 간행된 {庚戌世譜』(1986년刊)를 근거로 그의 家系 및 이동경로와 출생지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庚戌世譜}에 의하면, 전봉준 장군은 天安全氏 文孝公(名은 信, 號는 栢軒)派의 枝派인 連山公(敏) 曾孫 松庵公(五常)孫派에 속해 있다. 그는 천안전씨 始祖로부터는 53世孫이며, 文孝公으로부터는 17世孫이고, 松庵公으로부터는 10世孫이다.25) 松庵公 五常으로부터 그에 이르기까지의 家系를 圖表로 구성해 보면 위와 같다.  
  위 도표의 내용을 보면, 五常이 宣務郞을 지냈고, 그의 아들 誠도 通德郞을 지냈거니와 전봉준 장군의 高祖父가 되는 相圭도 通德郞의 벼슬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전봉준 장군 先代의 집안은 비록 지체가 높지는 않지만 양반의 가문이었던 듯하다.26) 그러나 曾祖父인 道臣 이후로는 관직을 지낸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음을 보면, 그의 집안은 점차 몰락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봉준 장군의 집안은 厚徵代에 泰仁 부근에 자리를 잡은 후, 남원 순창 등지를 거쳐 증조부인 道臣代에 임실 강진면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丙戌世譜』에 後徵과 그의 妻의 묘지가 泰仁 古縣面에 위치하며, 그의 아들 萬紀夫婦의 묘가 南原 北面에 위치하고, 그의 손자인 相圭부부의 묘가 淳昌 下峙洞에, 그리고 道臣부부와 그의 長子인 碩雲의 묘지가 모두 임실 강진면 栗峙에 있음에서 추정할 수가 있다. 물론 묘지가 위치한 곳이 반드시 거주지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교통수단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葬地와 거주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이러한 추정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집안은 2代 정도에 걸쳐 임실 강진면에서 거주하였던 것이지만 일찍이 道臣의 아우 德臣은 井邑 西二面으로 이주해 나가고27), 또한 도신의 자식대에 이르러서는 碩雲의 동생 즉, 전봉준의 祖父인 碩豊의 묘지가 古阜 南部面에 있음을 보면, 全琫準家도 조부 때에 큰집과 떨어져 고부군으로 이주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증조부, 조부대에는 임실, 정읍, 고부 등지에 각기 흩어져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런데 전봉준의 父親代에 이르러서는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高敞 德井으로 모두 이주하여 합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일 장손인 基弼과 그의 妻의 묘가 德井 回巖峙에 있음으로 보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실에서 덕정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고, 전봉준의 작은 아버지인 基性의 묘도 역시 같은 곳에 있음으로 보아 고부에서 고창 덕정으로 이주해 왔음을 알 수 있으며, 碩文의 자손인 基煥의 家와 基守의 家 역시도 이들 묘가 모두 堂村과 西山 등지에 위치함으로 보아 정읍에서 고창 덕정으로 이주해 왔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다만 전봉준 장군의 부친인 基昶의 묘지가 世譜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들과 합류했는지 여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基昶의 친 동생인 基性뿐 아니라 사촌 큰형인 基弼의 家, 그리고 6村인 基煥, 基守의 집안까지28)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고창 덕정면 당촌으로 모여 든 것은 분명 우연은 아니며, 서로간에 긴밀한 협의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 基昶 역시도 동생인 基性과 함게 같은 무렵에 고부에서 이곳 고창 덕정면 당촌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송암공파 자손들은 당촌에 정착한 후 3대째 이곳을 터전으로 해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이거니와, 특히 기환의 자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직후까지도 이곳에 계속 거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29)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전봉준 장군의 집안은 조부대까지만 해도 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부친인 基昶代에 이르러서 모두 고창 덕정면 당촌으로 이주하여 합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 곳에 천안전씨 20여 호가 살았다는 증언과도 일치하거니와 이를 사실로 인정한다면 전봉준 장군이 바로 이곳 당촌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며, 앞에서 소개한 吳知泳을 비롯한 여러분의 증언 및 주장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4.『丙戌世譜』를 통해서 확인되는 몇가지 사항  

  이제 『丙戌世譜』를 통해 전봉준 장군의 신상과 행적에 관한 몇가지 사항에 대해 추정해 보고자 한다. 우선 『丙戌世譜』 卷6에 기록되어 있는 전봉준 장군에 관한 내용을 적시하면 아래와 같다.  

"初名 鐵爐, 字 明佐, 哲宗 乙卯 十二月 三日生. 配 礪山 宋氏 斗玉女辛亥 八月 十六日生. 忌丁丑 四月 二十四日. 墓 泰仁 山內面 巢禽洞 祖 墓下 卯坐. 後室 南平 李氏文琦女"  

  위의 내용에서 먼저 전봉준 장군은 哲宗 乙卯년, 즉 1855년 12월 3일에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래 그의 출생년대에 대해서도 1854년인가 1855년인가 분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1855년생임이 거의 인정되는 바이지만 그의 구체적인 생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30)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丙戌世譜』를 통해서 그가 1855년에 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그의 생일도 12월 3일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전봉준의 처음 이름은 鐵爐이고, 자는 明佐였으며, 그의 호적상의 이름은 炳鎬였음을 알 수 있다. 종래 그의 이름은 봉준 외에 泳準, 字는 明淑, 別號로 녹두 등의 명칭이 알려져 왔다. 여기에서 泳準이라는 이름과 明淑이라는 자는 僞作으로 밝혀진 천안전씨 三宰公派의 족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하겠지만, 혹 당시 이러한 명칭으로도 불려졌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供草의 내용 가운데 明淑은 '나의 字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음을 보면 明淑이라는 字를 사용했음은 확실하다 하겠다.31) 아울러 供草의 내용에서 전봉준은 '전봉준이라는 이름 하나뿐이다' 라고 대답하고 있지만 '너의 이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 도대체 몇 개나 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에 대한 추궁을 끈질기게 하고 있음으로 보아32) 전봉준은 실제 여러 이름을 사용했거나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지만 당시 웬만한 사람이면 호적상의 이름, 실제 부르는 이름, 字, 雅號, 別號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하면 전봉준 장군도 琫準이라는 이름 외에 호적상으로는 炳鎬, 字로는 明淑과 明佐, 別號로 녹두 등으로 불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위 世譜의 내용을 통해서 전봉준 장군은 성년이 되어 4살 위인 礪山 宋氏 斗玉의 딸(1851년 8월 16일생)과 혼인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의 妻에 관해서 종래에는 全州 崔氏로 알려진 적도 있었다.33) 그러나 供草의 내용에서도 비서였던 宋熹玉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신문하고 있거니와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전봉준은 妻家로 7寸이 된다고 대답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34) 전봉준 장군의 妻家는 礪山 宋氏임을 확인할 수 있다.35) 한편 그의 빙부인 宋斗玉은 당시 務安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장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36)  
  아울러 위 世譜의 내용에서 전봉준 장군은 1877년 4월 24일에 妻와 死別을 하고 그의 처를 泰仁 山內面 巢禽洞 할머니 묘 밑에 안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전처와 사별했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지만 언제 사별을 했는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질 안았는데, 우리는 위 내용에서 전봉준은 23세의 젊은 나이에 상처를 한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다. 또한 전봉준 장군의 처의 무덤이 지금까지는 구끼찌 겐조의 주장에 따라 황토현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37) 위 世譜의 내용에 근거한다면 산내면 소금동에 안장했음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38)  아울러 이 묘지의 위치와 관련해서 추정되는 것은 전봉준 장군이 喪妻했을 무렵 그는 태인에 거주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언제 태인으로 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할머니 묘소도 산내면 소금곡임을 미루어 생각하면 적어도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1876년 이전에 이곳 태인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전봉준이 어려서 堂村을 떠나 태인에 거주했다는 주장과도 일치하거니와39) 특히 '전봉준이 당촌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전주 구미리로 이주했다가 다시 태인 감산면으로 이사하여 몇해를 지내다가 18세 되던 무렵 태인 산외면 동곡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하였다'라는 최현식의 주장은 상당히 정확하다고 보여진다. 태인은 전봉준의 6寸 兄인 泰鎬가 일찍이 당촌을 떠나 살고 있던 곳으로40) 전봉준이 연고가 있는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이 개연성이 크다 할 것이며, 또한 조모와 처를 안장했던 산내면 소금곡은 태인 산외면 동곡과 인접해 있는 곳임을 생각하면 이 무렵 그는 동곡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41)  
  마지막으로 위 『丙戌世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喪妻를 한 이후 전봉준은 後室로 南平 李氏 文琦의 女息을 후실로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기존에 전봉준은 再娶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42) 일반적으로 前妻와 死別을 하고 後室을 얻은 사실이 인정되고 있으며,43) 특히 구끼찌 겐조가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이 고향인 태인 東谷으로 돌아왔을 때의 광경을 묘사한 내용 가운데 '이곳에서는 후처인 이소사가 오랫동안 외로운 안채를 지키며 전처의 소생과 자기의 소생 두 아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갑자기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이소사의 기쁨과 두 아이의 환호는 비유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44)라는 내용을 견주어 생각하면 전봉준의 후실은 李氏 姓을 가진 여인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丙戌世譜』를 통해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彰赫, 亨鎬, 承  등의 이름과 함께 호적명은 基昶임을 알 수 있고, 그의 모친은 1821년 생으로 彦陽金氏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世譜에 의할 것 같으면, 전봉준은 東一이라는 한 아들을 두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東一은 『丙戌世譜』가 간행이 된 1886년생인 것으로 보아 후처의 소생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 전봉준의 큰집인 泰鎬의 家는 後嗣가 없어 東吉을 양자로 삼아 代를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東吉은 琫準의 자식인지 斗鎬의 자식인지 확실치 않으나 이 두 집안 중 어느 한 집의 자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큰집에 양자를 입적시킬 때에는 작은 집의 자식 가운데 적장자를 入籍시키는 것이고 보면 아마 東吉은 전봉준의 長子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봉준의 두 아들은 東吉과 東一이었던 것 같다.45)  

    5. 맺음말  

  이상에서 전봉준 장군 출생지와 관련한 제설을 살펴보고, 『丙戌世譜』를 통해 그의 家系 및 출생과 그밖의 몇가지 사항을 확인해 보았다. 종래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에 관해서 여러 많은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高敞 堂村 出生說을 제외한 다른 주장들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고창 당촌 출생설 역시도 吳知泳에 의해 일찍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없었기 때문에 定說로는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설은 다른설에 비해 신뢰성있게 받아들여져 왔거니와 근자에 이르러 『丙戌世譜』가 세상에 빛을 보게되면서 더욱 신빙성을 얻어가고 있으며, 기존에 다른 설을 제기했던 연구자들까지도 이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  
  『丙戌世譜』에 있는 全炳鎬라는 인물이 전봉준 장군이었음은 이제 거의 확인이 되고 있고, 天安全氏 門中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庚戌世譜』를 간행하여 두 인물을 동일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世譜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전봉준 장군의 家門은 祖父代까지만 해도 임실, 정읍, 고부 등 각지에 흩어져 살아왔다. 그렇지만 父親代에 이르러 이들 모든 집안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高敞 堂村으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생활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또한 전봉준의 부친인 基昶도 이무렵 여러 형제 및 인척들과 합류하거니와 전봉준 장군은 바로 이곳 堂村에 정착한 이후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世譜의 내용에서 이들 松庵公 자손들은 이곳 堂村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맞이할 때까지 3대 째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전봉준은 堂村을 떠나 泰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 및 주장과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또한 世譜의 내용을 통해 전봉준은 그 동안에 礪山 宋氏와 혼인을 하지만, 1876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를 이어 이듬해에 전처와도 사별하는 슬픔을 맞고, 이후 南平 李氏를 後室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도 확인이 되거니와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는 전봉준 장군의 가계와 부합되는 내용들이다.  
  아무튼 이상의 내용에서 『丙戌世譜』의 전봉준 관련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부합되거니와 이에 근거한 전봉준 장군의 고창 당촌 출생설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PREV :   杞 憂 관리자 
 NEXT :   첨성대의 실체 관리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