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杞 憂
 관리자  09-08 | VIEW : 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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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亨祚의 고사성어 산책 ⑦

                             杞 憂

   기(杞)나라에 한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떡하냐는 걱정에 시달려
   잠도 이루지 못했다. 누군가가 안타깝게 여겨 우주의
   생성원리를 설명해주자 그는 비로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가 들은 우주의 생성원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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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역사는 아득한 전설 속의 문화적 영웅인 요순(堯舜)에서 시작된다. 순(舜)은 고질인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곤(鯤)이라는 인물을 등용했다. 곤이 치수에 실패하자 순은 그의 아들 우(禹)에게 그 일을 맡겼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황하의 전체 시스템을 고려하여 물길을 트고 제방을 쌓아나갔다. 기록에 의하면 진흙길을 누비느라 정강이털이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우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정작 우는 선양(禪讓)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겼다. 이로써 최초의 세습왕조인 하(夏)가 열렸다. 『상서(尙書)』는 4천년 전의 아득한 역사를 적어 두고 있지만 그 실상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최근 발견된 이리두(二里頭) 유적이 이 시기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다.

   하왕조는 기원전 18세기경 탕(湯)이 이끄는 상(商)에 의해 정복됐다. 그로부터 몇백년이 지나 서북에서 강성해진 주(周)의 무왕(武王)이 다시금 상(商)의 도읍인 은(殷)을 초토화시키고 새 왕조를 열었다.기원전 12세기 무렵의 일이다. 무왕은 피정복민인 은의 저항을 우려해 낙읍(洛邑)의 아래쪽 송(宋)에 유민들을 집단이주시켰다. 이와 함께 지금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하나라의 유민들을 위해서도 땅 한뙈기를 내주었다. 송의 서북쪽 한귀퉁이에 세워진 기(杞)가 바로 그 곳이다.
   주의 정복민들은 망국의 유민인 송과 기의 백성들을 집단적 학대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듯하다. 춘추전국기의 문헌에는 이들이 저지르는 어리석고 못난 사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가령 한비자는 나무에 받혀 죽은 토끼 한 마리를 얻은 한 농부의 일을 적고 있다. 그는 농사를 팽개치고 매일 그 자리에 지켜서서 토끼를 기다렸다고 한다. 또 맹자는 벼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뿌리를 한치씩 뽑아올린 농부의 일을 들고 있다. 이야기를 듣고 놀란 식구들이 들판으로 달려가니 곡식은 죄 말라 죽어 있었다. 이로부터 조장(助長)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이 두 사건의 주인공은 송나라 사람이다. 그밖에 비슷한 사례를 두엇 더 본 적이 있다.

                         이유있는 근심

   기나라에도 한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떡하냐는 걱정에 시달렸다. 밥도 못 넘기고 잠도 이루지 못하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 누군가가 우주의 생성원리를 설명해 주자 그제서야 안도하며 편안한 잠을 청했다 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이 일화를 단서로 하여 동아시아의 자연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열자』는 잡다한 사상이 혼재해 있지만 대체로 도가(道家)계열의 저작으로 분류된다. 그곳 천서(天瑞), 즉 우주에 대한 사색이 담긴 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버리면 몸을 의지할 데가 없어질텐데 어떡하지』하는 걱정에 밥도 못 넘기고 잠도 못 이루던 사람이 있었다. 그걸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있어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겠노라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기(氣)가 쌓인 것입니다. 천지에 꽉 들어찬 것이
   이것이지요. 당신이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는 것이 모두 이 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어째서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습니까』

   걱정에 싸인 사람이 말했다. 『하늘이 정말 기가 쌓인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질 것 아닙니까』

   『해와 달과 별들 또한 (하늘과 마찬가지로) 쌓인 기 가운데
   빛나는 종류일 뿐이니, 떨어진다 하더라도 다칠 리는
   없습니다』

   『(그럼) 땅이 꺼져 버리면 어떡합니까』

   『땅 역시 덩어리(塊)가 쌓인 것입니다. 사방에 꽉 들어찬
   것이 바로 이 덩어리들 아닙니까. 아무리 밟고 굴러도 다 이
   덩어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어째서 땅이 꺼질까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걱정에 싸였던 사람이 비로소 안도감에 기뻐했다.

   기나라 사람의 근심, 즉 기우(杞憂)는 이 일로 하여 「어리석고 쓸데없는 걱정」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걱정이 마냥 뜬금없고 어리석은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에 치는 천둥과 번개, 그리고 1년의 농사를 일순에 주저앉히고 마는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지변에 놀란 가슴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견고성과 안전성을 쉬 믿지 못한다.

                      어느 과학자의 설명

   어리석은 이의 강박관념을 풀어주려 한 과학자가 나섰다. 그의 설명에서 우리는 우주와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적 인식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 그 얼개는 다음과 같이 정돈할 수 있다.

   세계는 보편적 원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 원질이 이른바 기(氣)다. 기는 먼지보다 미세한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그 원형적 이미지는 숨 혹은 바람이 제공했을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신비한 무엇을 떠올리면 좋겠다). 이 미세물질은 우주의 광막한 공간에서 서로 밀리고 부딪치면서 자체 변화를 일으킨다. 무겁고 딱딱해진 기는 아래로 가라앉아 대지를 형성하고, 가볍고 부드러운 기는 위로 올라가 하늘을 덮는다. 해와 달과 별들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종류들이다.

   과학자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①하늘은 우리가 내 쉬는 숨과 같은 재질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무너질 리가 없다. ②해와 달과 별들은 「빛을 내는 부드러운 공기」일 뿐이기에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③땅은 딱딱한 고형질로 메워져 있기에 꺼질 일이 없다.
   여기서 ③은 땅을 사방이 막힌 공간으로 상정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 ②는 해와 달과 별들이 부드러운 공기가 아니라 단단히 뭉친 기의 덩어리라는 반론에 부딪쳤다. ①의 경우는 좀 복잡하다. 동아시아에서 하늘은 지표 위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었음을 일러두어야겠다.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을 거느리고 땅과 더불어 운행하는 시스템의 한 계기이다. 하늘 또한 대지와 마찬가지로 한정되고 특화된 기의 집적물인 바, 한시성과 유한성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과학자의 논거는 엉성하고 취약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은 이 설명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장려자의 천지붕괴론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를 들은 현자 장려자(長廬子)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바람과 비와 무지개, 구름과 안개, 사계절의 변화, 이 모두는 하늘을 형성하고 있는 기(氣)의 무늬다. 그리고 산과 바다, 쇠와 돌, 불과 나무 등은 땅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덩어리(塊)들이다. 하늘과 땅이 결국 『모인 것』이라면 어느땐가는 해체될 날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를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는 예측하지 못할 뿐. 그날이 닥친다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바람과 비, 구름과 안개, 산과 바다처럼 모든 모인 것들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하늘과 땅처럼 넓고 큰 것도 그것이 기(氣)의 집적인 이상, 해체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우주 역시 탄생과 소멸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과정이다. 장려자는 한번 열린 천지가 언제쯤 닫힐지 인간의 유한한 머리로 가늠할 수 없다고 탄식한다. 후일의 한 유학자는 지금의 천지가 1만년 전쯤 열리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했다. 송대(宋代)의 학자인  소강절(邵康節)은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  우주적 개벽(開闢)의 주기를 예언자처럼 적어놓기도 했다.
   요컨대 어리석은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려 천지의 견고성을 설득하는 과학자의 설명이 있었다. 이에 대해 장려자는 천지는 결국 붕괴하게 되어있다면서 다시금 기나라 사람을 잠못 들게 했다. 이런 한바탕 소란을 주선한 다음, 주인공인 열자가 등장한다. 그는 단호한 회의주의자의 목소리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사람도 틀렸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람도 역시 틀렸다. 무너질지 아니 무너질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또 무너지면 어떻고 아니 무너지면 어떠랴.
   살아서는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어서는 삶을 알 수 없다. 오는 사람은 가는 사람을 알지 못하고 가는 사람은 오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무너지든 아니 무너지든 무엇 신경 쓸 일이  있으리.

                  움직임(易)으로 이해된 자연

   장려자의 생각은 우주에 대한 동아시아적 모형을 제공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자연주의에 의하면, 우주의 원질이자 동력인 기(氣)는 태초이전부터 존재한다. 그것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제작되거나 탄생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시작이 없으므로 끝도 없다. 이른바 무시무종(無始無終), 일기장존(一氣長存)이다. 이 기는 자신의 분화와 활동에 대해 자기 너머 혹은 외부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주를 주재하는 신의 의지나, 로고스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주의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고 감독하는 무대 뒤의 인물은 없다. 우주는 특정한 의도나 인위적 목표가 없이 오직 저 「스스로 생성하고 조직해 나갈(自然)」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에서의 절대는 자연이다.
   사람들은 기획자가 없이 어떻게 계절의 규칙적인 순환이나 생명의 유기적 소장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자연을 정지된 원자들의 기계적 결합에서 보는 문화의 산물이다.  세계를 정지에서 읽으면 운동의 명령자가 누구냐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신 혹은 유사한 초자연적 원리가 그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는 이와는 달리 세계를 그 움직임(易)에서 파악했기에 우주의 원동자나 제일원인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어째서 동아시아에 창조설화가 발달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유일한 예외라고 할 반고(盤古)의 설화는 기원전 3세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보드(Bodde)는 반고의 설화가 아마도 남중국과 동남아시아, 아니면 인도에서 수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서양은 동양과 접촉하면서 끊임없이 창조를 물었고, 동아시아는 이에 대한 손쉬운 응답으로 이 얘기를 묵은 상자에서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도 여느 문명과 마찬가지로 초월적 존재들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 영속하는 초월자와 조상신에 대한 개념은 아주 오랜 것이다. 하늘을 가리키는 천(天)이란 말은 본시 절대권력을 가진 주(周)의 조상신을 상형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문주의가 진전되면서 신적 질서는 자연적 질서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을 거치면서 기의 인식이 정립된 이후에는 일신론의 충동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아시아의 모형에 의하면 하늘과 땅에 존재하고 현상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기의 작용과 변이로 환원된다. 그들이 자연에서 최초로 확인한 것은 사물과 현상의 모임과 흩어짐이었다.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주목한 고대의 동아시아인들은 자연을 근본적 물질 혹은 원자들의 배열로 보지 않고 가변적 연장(extension)을 한시적으로 확보하고 있는(客形) 불안정하고 우연적인 덩어리로 보았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비연속적 원자라는 관념은 유(有)와 무(無),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자유로운 교대와 변환에 주목한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음양은 기의 일차적 분화이면서 활동의 원리를 나타낸다. 음양은 결코 특정한 실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밀고가는 두 대극적 힘의 상징적 기호 같은  것이다.
   오행 역시 만물의 기본적 단위 혹은 원질이 아니다. 행(行)이란 용어에서 이미 세계를 국면 혹은 진전의 과정에서 바라보겠다는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오행은 데모크리토스나  뉴턴의 원자와 달리, 활성적 기의 권능이 행사하는 일시적 힘의 다발 같은 것이다. 물과 불처럼 투명하고 유동적인 사태와 대면한 원시신화적 반응을 명상해 보라. 바슐라르의 원소들에 대한 명상이 오행론의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도와줄지 모른다.
   기의 비정형적 특성을 대표하는 모델이 물과 불이다. 가볍고 상승하는 불은 양(陽)의 물질적 상징으로, 무겁고 하강하는 물은 음(陰)의 물질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윽고 불은  하늘이 되고 물은 땅이 되었다.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고 나서 그 안에 나무가 피어나고 금속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발생의 순서이다. 음양의 교호작용이 땅에서 오행을 만드는 동안 하늘에는 금 화 토의 다섯 별이 형성되었다. 양인 불이 형성한 하늘과 음인 물이 이룬 땅의 불균형으로 천지는 장엄하게 돌기 시작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양한 기상변화는 이렇게 펼쳐졌다.
   하늘과 땅 사이는 다양한 양태의 기들이 떠돌고 있다. 그것은 흡사 먼지가 자욱한 방이나 찌끼가 섞인 물그릇 같다. 기의 일차적 변형물인 음양오행이 서로 뒤섞이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차적 생성물이 생기고 이들로부터 다양한 생명이 태어난다. 이때 그 과정을 기계적 유물론적으로 연상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변이의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그 모양은 흡사 끓는 죽솥 속의 부글거림이나 바다에 이는 파도와 같다. 초기 도가(道家)나 진한대(秦漢代)의 잡가(雜家)의 저술에는 생명의 불가해한 생성과 변태에 대한   현란한 보고를 접할 수 있다. 기의 세계는 원론적으로 생물학적인 공간이다. 그들은 물리적 역학마저 물활론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기를 물질이나 에너지로 번역할 때 생기는 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氣)의 영원회귀

   우주와 만물을 일원적 기의 변이로 보는 자연주의적 설명에서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식물의 생명과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아니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사유에 의하면 생명과  무생명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기를 매개로 서로 넘나드는 것이다. 유기농법을 적절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배설물은 땅으로 돌아가 썩어 훌륭한 거름이 되고, 이 거름은 배추의 생명이 되어 인간의 생명으로 화한다. 이런 연속적 사유에서는 유물론과 유심론의 형이상학적 논쟁이 원천적으로 제기될 수 없다.
   기의 영원회귀론(物化)은 장자에서 보았듯이 탄생의 의미를 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떠도는 기들의 우연적 결집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 호들갑떨지 않는다. 죽음이란 본래의 고향인 태허(太虛) 속으로 되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란 흡사 얼음이 한번 굳었다가 다시 풀리는 것에 비할 수 있다. 영생이란 인간중심의 환상이거나 철없는 아집일 뿐이다. 해가 지는데도 놀이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어린아이처럼.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놀란 혜시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처음 아내의 죽음 앞에서 나라고 어찌 슬프고 아득한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생명(生)의 시원을 돌아보니 그게 본래는
   없었던 게 아닌가. 더 거슬러 가 보면 생명은커녕, 아무런
   형체(形)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형체는커녕 그걸 구성하는
   기(氣)도 없었던 때가 있었네. 그 혼돈(混沌)의 흐릿함 속에서
   어쩌다가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변해서 생명이 있게 되었네. 지금 그게 또 변해서 죽음이 된
   게 아닌가. 이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진행되는 것과
   같은 거야. 아내는 지금 천지(天地)라는 거실에 편안히
   누워있다네. 그런걸 지금 울고불고 곡을 해서 시끄럽게
   해야겠나. 그건 운명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생각되어 그만둔
   것일세』

                     영혼의 음양은 혼과 백

   사람들은 장자의 아내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기의 영원회귀에서는 삶과 죽음이 그랬듯이 신체와 영혼 또한 이원화시키지 않는다. 영혼이나 의식은 신체와 같은 기의 물질적 현상이다. 물론 특성의 차이는 있다. 신체가 무겁고 둔한 음(陰)인 데 비해, 영혼은 가볍고 민감한 양(陽)이다. 신체가 거친 데 비해 영혼은 정련되어 있다. 그 영혼도 자체  내에 음양의 두 부분을 함장하고 있다. 자극에 반응하고 신체의 욕구를 구현하는 수동적 부분(陰)과, 신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정신의 적극적 능력(陽)이 그것이다. 전자를 백(魄), 후자를 혼(魂)이라 부른다.
   혼백은 죽음과 더불어 신체와 분리된다. 분리된 혼백은 대기 속에서 자체의 무게에 따라 갈라진다. 무거운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가벼운 혼은 하늘로 뜬다. 사람들은 땅으로 돌아간  백은 돌아보지 않는다. 문제는 혼이다. 혼은 백과는 달리 자아 혹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천지간에 가장 순수하고 정련(精鍊)된 기로 이루어졌기에 쉽사리 태허로 흩어지지 않는다. 일정 기간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의 영혼과 닮은 데가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혼 역시 기의 집적인 한 물질성을 떠날 수 없고 그래서 또한 한시적 존재성을 지닌다. 혼의 존속기간은 개인차가 있다. 한 세상 평온하게 살다간 사람은 조용히 자신의 흔적을 거두지만 성정이 드세거나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혼은 쉽사리 소멸되지 못한다. 죽음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특유한 의식은 이와 같은 영혼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상에 대한 제사나 초혼의식,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혼을 다스리는 진혼굿, 귀신이나 도깨비에 얽힌 민담과 전설 등.
   곡절과 경과는 조금씩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혼은 신체나 백과 같이 태허의 공간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기의 저수지 속에서 혼은 자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징표를 잃고 만다. 혼은 다른 사물이나 현상과 마찬가지로 다만 『모였다 흩어질(聚散)』 뿐인 것이다. 영혼의 불멸이란 테제는 동아시아에서는 지극히 낯선 것이다. 불교가 전래하면서 영혼의 영속성이 비로소 철학적 논의의 도마 위에 올랐지만 윤회(輪廻)는 동아시아적 자연관의 공고한 벽을 뚫지 못했다.

                        음양오행의 원리

   자연의 유기적 연관, 그리고 상관적 동시성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기의 생성과 변화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른다고 한 바 있다. 음양은 동적 생성과 변화에서 정적 차이와 구별을 포괄하는 대극적 힘의 상징적 기호이다. 음양은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 연관을 축으로 한다. 이에 대해 오행은 자연의 각 요소 사이에 주고받는 상호영향의 원리를 정식화하고 있다. 음양의 활동에 의해 구체적 성질을 띤 기의 분신, 즉 오행 사이에는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우주적 수준의 사랑과 미움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오행 사이에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힘이 동시적이고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물고 물린 이들의 연관고리를 단순화하면 이렇다.
  ①상생의 고리: 나무는 연료로 소비되어 불을 낳고(木生火), 불은 연소의 산물로 재를 낳는다(火生土).  흙은 광석의 생장을 도와 금속을 낳고(土生金) 쇠는 물을 낳는다(金生水: 이 발상의 기원은 애매하다. 청동거울에 맺힌 아침이슬에서 연상했다는 설도 있고, 주물을 위한 금속용해에 주목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물은 식물의 자양분으로 나무를 낳는다(水生木).    ②상극의 고리: 나무로 된 농기구는 흙을 파헤치고(木克土), 흙은 제방을 통해 물길을 제어한다(土克水), 물은 불길을 잡고(水克火), 불은 쇠를 녹인다(火克金), 그리고 쇠는 나무를 베고 깎는다(金克木).

   오행 사이에는 상생과 상극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했다. 가령 불길이 성해졌다고 하자. 불은 상생의 원리에 의해 흙을 강화하고, 상극의 원리에 의해 쇠를 억압한다. 그렇다고 흙이  마냥 성해지거나 쇠가 결국 소멸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불의 증강과 동시에 그 세력을 억지하려는 힘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작용은 두 방향에서 온다. ①불이  성해지면 흙이 왕성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풍부해진 흙이 쇠의 생장을 도와 결국 불의 의도는 무력화된다. ②불이 강화되어 쇠를 핍박하면 쇠는 그가 낳는 물을 통해 가해자인  불을 제어한다. 전자는 촉진의 원리라 할 법하고, 후자는 제어의 원리라 할 법하다. 그리하여 오행은 상호제어와 상호촉진의 협력으로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한다. 그 동적 평형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생리학적이며, 동시에 생태학적 전망을 함축하고 있다.

                         자연과의 합일

   자연에는 명령자나 기획자가 없다. 그럼에도 만물의 다양한 의지는 질서정연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모형은 거의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근대과학은 사물과 현상, 무엇보다 생명의 신비를 탈각시켜버렸다. 자연에 대한 외경과 겸허는 이제 먼 얘기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자연의 위용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이전에 너무 일찍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에 노출된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은 들여다볼수록 신비스럽고 두려운 존재이다. 기계론적 자연관을 넘어 이원자세계의 혼돈과 불확정성에 부닥친 상당수의 현대과학자들이 신비주의로 경도한 것을 나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자연의 신비로운 질서는 인간을 압도한다. 그것은 절대적 권위로서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인간의 이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행위의 준칙과 사회적 질서의 구상(道)은 자연이 스스로의 길(道)을 통해 선험적으로 예비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는 이 전제를 근본적으로 의심한 적이 없다. 그들이 갈라졌던 것은 자연이 지시하고 있는 이념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존재(Sein)와 당위(Sollen)의 간격이 첨예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인의 절대는 자연이다. 그들은 외적 세계의 관찰과 신체적 생리의 탐구, 그리고 도덕적 본질의 주의를 통해 자연의 숨겨진 뜻을 확인하고 그와 일치되고자 했다. 삶의 궁극적 목표가 거기에 있었다. 그 기이한 구도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고 부른다. 『중용(中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자연의 영원한 질서는 하늘의 길이고, 그 길을 본받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
   부분의 전체에 대한 협력을 도덕이라 부른다면, 그들은 도덕을 외적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충동으로서, 그리하여 천인합일을 언제나 궁극적 자기실현으로 인지했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제기된 철학의 근본문제였다. 존재와 당위의 연속을 의심하지 않고, 자유와 구속의 궁극적 일치(從心所欲不踰矩)를 지향한 문화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상관적(co-relative) 사유는 특정한 사태나 대상의 가치를 고정시키거나 절대화하지 않는다. 『주역(周易)』에 특징적이듯이 선(善)은 언제나 상황과 여건의 시간성 속에 있었다. 특정가치의 일방적 확장은 영양과다처럼 유기체의 건강을 다치게 마련이다. 정감의 표출이나 사회적 활동에 있어서도 과격하거나 극단적인 태도는 환영받지 못했다. 여기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전체에 대한 조화와 협력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 비민주적 권위주의와 손잡지 않을 것이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다. 전체를 중시하는 통체적(holistic) 발상은 언제든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미끄러질 수 있다. 이 문제의 인식과 해법을 둘러싸고 도가와 유가는 첨예하게 갈린다. 도가는 봉권적 권위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원시농경을 모델로 하는 공산적 집산주의를 제창했다. 공자를 비롯한 유가학단은 봉건적 권위 안에서 엘리트의 사회적 책임과 헌신을 통한 권력의 합리화를 기도했다. 그 기획이 어느 정도 성공했느냐는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 공과를 정당하게 평가할 겨를도 없이 타율적 강제가 이 기획을 정지시켜 버렸다.
   20세기는 서구의 근대과학과 민주주의의 실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권위주의가 쇠퇴하고 민주주의적 환호가 울린 지 몇해 되지 않아 우리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 바탕에 나는 전체를 무시한 부분의 오만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주의의 과잉이 공동체의 질서와 화합을 다치고 있고, 진보의 환상이 생태의 균형을, 성장의 맹목이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있다.
   자유와 권리 같은 취득적 공격적 구호는 이제 유보되어야 한다. 전체적 시스템을 돌아보지 않는 개인의 이기와 집단의 자기주장이 얼마나 위험하고 파괴적인지를 우리는 지금 뼛속깊이 실감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책임과 헌신의 자세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인간은 원자화된 파편으로 독립할 수 없다. 전체에 협력하지 않으면 개인은 존립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엄정한 유기체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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