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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異山 800리 榮辱의 현장
 관리자  10-06 | VIEW : 1,903
  국보기행(12) - 智異山 800리 榮辱의 현장 一周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피아골은 피밭골의 轉音

전남 구례군 산동면 내산리 「온천지구」에서 하룻밤을 지낸 李五峰 부장과 필자는 지난 11월1일 아침 19번 국도를 되짚어가며 智異山 피아골 燕谷寺(연곡사)를 향해 출발했다.
  
  智異山 「피아골」이라면 뭔가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피가 냇물처럼 흐르고 해골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듯한 골짜기―이런 인상을 주는 이름 때문일까. 하지만 그건 오해다. 피아골은 피(稷)를 심던 밭(田)이 있던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피밭골」이 「피아골」로 轉音(전음)된 것이다. 지금 燕谷寺 바로 윗동네의 이름이 稷田里(직전리)이다.
  
  雙磎寺의 들머리길인 화개장터를 2.6km 앞두고 외곡리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 삼거리에 경찰초소가 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을 통과하던 차량이라면 일일이 검문을 당했는데, 이번에 보니 그냥 통과였다. 李泰(이태·故人)의 체험수기 「南部軍」을 보면 6·25 때 智異山 빨치산들이 「상훈 수여식」을 거행한 뒤 한판의 「피아골 축제」를 벌이는 기괴한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츄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式 포크댄스를 추며 흥을 돋우었다』
  
  외곡리 삼거리에서 19번 국도를 버리고 좌회전,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8km 쯤 북상하면 燕谷寺에 이른다. 도중에 초록색 차밭과 밤나무 숲이 널려 있다. 계단식 밭(다락밭)도 많다. 군데군데에 그림같은 산골마을이 들어섰는데, 10여 년 전에 비해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모습이다. 李부장은 『집들 잘 짓고 사네』라고 감탄한다.
  
  燕谷寺 주차장의 하루 주차요금 4000원. 오전 8시―아직 텅 비어 있다. 燕谷寺는 지리산에서 제일 먼저 들어선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창건되었다니까 화엄사보다 1년 먼저 세워진 고찰이다.
  
  
  燕谷寺는 護國僧軍의 총본산
  
  창건주는 緣起祖師(연기조사). 화엄사의 창건주와 같다. 緣起祖師가 지금의 대웅전 자리를 지나다가 연못 속에서 제비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절을 지어 燕谷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무튼 燕谷寺를 짓고 그 다음해에 화엄사를 지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그렇다면 燕谷寺와 화엄사의 둘 중 어느 하나는 緣起祖師의 높은 명성을 假託(가탁)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창건 초기 燕谷寺는 화엄사의 영향으로 화엄종의 성격을 띤 사찰로 추정되나 고려 왕조에 들어 화엄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修禪道場(수선도량)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燕谷寺는 우리 민족사의 궤적과 동행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국 僧軍(승군)의 총본산으로 활용되었다. 西山大師와 四溟大師(사명대사)가 이곳에서 호국승군을 지휘하여 「活人寶劍(활인보검)의 도량」이란 명성을 얻었다. 그 보복으로 왜군은 燕谷寺를 철저히 방화했다. 소실된 燕谷寺는 인조 5년(1627) 逍遙大師 太能(소요대사 태능)에 의해 복구되었다.
  
  그러나 燕谷寺의 수난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48년 麗順 14연대 叛亂事件 이후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때까지 피아골은 빨치산의 유력한 거점이었다. 빨치산의 아지트가 된 燕谷寺는 토벌작전상의 이유로 군경에 의해 다시 불태워졌다.
  
  1980년 후반만 해도 燕谷寺는 법당 한 채와 요사채 하나가 덩그렇게 세워져 있을 따름이었다. 최근 들어 신도와 스님들이 힘을 합쳐 일주문, 종각, 삼선각, 명부전 등을 갖추게 되었다. 앞으로 燕谷寺는 규모를 더 키울 계획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가 좋다. 번지르르하고 울긋불긋한 寺宇가 꽉 들어찬 절집은 필자가 좋아하는 모습이 아니다. 절집은 餘白(여백)이 있어야 좋다. 餘白이 있어야 信心을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寺院의 위용을 떨치려는 요란한 佛事는 싫다. 지금 燕谷寺의 大寂光殿(대적광전=대웅전) 앞 감나무엔 까치밥(감) 몇 개가 고즈넉이 달려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혜의 보살인 「文殊菩薩(문수보살)의 常住도량」이며 1500년 古刹인 燕谷寺의 品格이라고 느껴진다.
  
  
  國寶 제53호 燕谷寺 東부도의 華麗無比
  
  燕谷寺는 東부도와 北부도로 그 역사의 깊이를 말해 주는 사찰이다. 그렇다면 浮屠(부도)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승려의 사리를 보관하는 무덤이다. 우리나라에서 부도는 禪宗(선종)의 발달과 함께 9~10세기에 많이 조형되었다. 스투파가 탑 또는 탑파란 말의 기원이 되었듯이 부도 역시 탑이란 말과 그 어원이 결코 다르지 않다. 후대에 들어 탑과 부도는 엄격하게 구분되었지만, 시작은 같이 했다고 봐야 한다.
  
  탑이 대개 대웅전 앞에 세워지는 것에 비해 부도는 사찰의 입구 또는 뒤편에 세워진다. 그 생김새의 다양함도 역시 탑과 다를 바 없다. 부도는 대개 신도들의 시주로 세워진다. 法力이 높은 큰스님은 그 영험이 후대에도 계속 미치기 때문에 그 사리를 사찰 경내에 모시는 것이다.
  
  燕谷寺 대웅전 동북쪽에 화려무비한 부도 하나가 세워져 있다. 국보 제53호 燕谷寺 東부도다. 누구의 부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곳이 道詵國師(도선국사: 827~898)의 수행처였다는 점과 관련하여 그의 부도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도선국사라면 高麗 태조 王建의 스승이며 우리나라 지리풍수설의 元祖다.
  
  東부도는 오랜 세월의 풍우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地臺石(지대석) 위에 基壇部(기단부)와 塔身部(탑신부) 그리고 相輪部(상륜부)를 쌓은 八角圓堂形(팔각원당형)이다.
  
  羅末麗初의 건축구조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東부도는 우리 石造예술의 걸작이다. 총 높이 3m. 사리병과 經文 등은 도굴당한 상태다. 李五峰 부장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면서도 연방 『진짜 아름답네, 지금 기술로도 어림없어. 나무로 깎아도 저렇게는 못 해』라고 감탄했다.
  
  東부도 옆에는 보물 153호 東부도碑가 있다. 碑身만 있으면 東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터인데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壬辰倭亂 때 왜병이 가져가다 섬진강에 빠뜨렸다는 얘기 등이 전해 온다.
  
  거북받침돌(龜趺:귀부)과 머리돌(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가 매우 특이하다.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어 마치 살아서 전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龜甲文(귀갑문)을 얕게 조각한 거북의 등 위에 큼직한 날개까지 달려 있다. 거북의 飛上(비상)―그 순간,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서 토끼는 영원히 거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국보 제54호 燕谷寺 北부도의 端雅함
  
  燕谷寺에 오면 北부도부터 먼저 보라는 얘기가 있다. 東부도를 보고 나면 공연히 눈만 높아져 北부도를 과소평가하는 무례를 범하기 쉬울 터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런 限界效用遞減(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東부도와 北부도 사이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東부도에서 북쪽으로 산길로 150m쯤 올라가면 北부도가 있다. 능선을 깎아 터를 닦아 반듯하게 모셨다. 8각 圓堂形을 기본으로 삼은 구조, 형태, 크기, 조각 등이 東부도와 비슷하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구름무늬가 조각된 8각의 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연화문을 새긴 覆蓮石을 두어 中臺石을 받치고 있다. 中臺石는 약간 낮은 편으로, 8각 각 면에는 眼象만 조각되어 있다. 上臺石은 仰蓮石으로 몸돌받침을 얹고 있다. 앙련 안에는 또 다른 꽃무늬가 새겨 있다.
  
  東부도가 화려하다면 北부도는 전체적으로 端雅(단아)하다. 화려함과 단아함 가운데 어느 쪽이 좋은지는 愚劣(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趣向(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각 部의 조각솜씨도 정교하다. 높이 3m.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北부도는 1999년 도굴에 의해 무너져 큰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도굴꾼이 노리던 사리함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燕谷寺의 한 스님은 『법력이 높은 스님이 後世의 도굴을 예상하여 聖寶를 塔身의 홈 속이 아니라 基壇 밑에 넣어 두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화받침과 보주가 새 돌로 만들어진 北부도는 2001년에 복원되었다.
  
  燕谷寺는 두 점의 국보 이외에 3층석탑(보물 151호), 현각선사 탑비(보물 152호), 東부도碑(보물 153호), 西부도(보물 154호) 등 네 점의 보물을 안고 있다. 兵禍(병화)를 자주 입어 돌로 된 것만 살아남은 셈이다. 燕谷寺 경내에는 구한 말의 의병장 高光洵(고광순)의 순절비도 세워져 있다. 그는 1907년 국권회복을 위해 燕谷寺에 근거지를 두고 의병할동을 벌이다 패전해 전몰했다. 이때도 燕谷寺가 불탔다.
  
  燕谷寺에 온 김에 피아골의 단풍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피아골로 오르는 865번 지방도로는 가로수로 터널을 이루고 있다. 벌통도 눈에 자주 띈다. 승용차로 그 사이를 뚫고 달리는 맛이 不勞所得(불로소득)인 것만 같아 흥감하기까지 하다.
  
  피아골의 단풍은 피빛같이 붉지는 않다. 2차색의 고급스러움이 운취를 더한다. 자동차 도로가 끝나는 곳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온 동네가 민박집, 상점 등이다.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종주의 출발점인 老姑壇(노고단: 1507m)이 솟아 있다.
  
  늙은 시어머니라는 뜻의 老姑는 신라의 시조 赫居世(혁거세)의 어머니 仙道聖母(선도성모)를 가르킨다. 신라 때는 선도성모를 나라의 수호신이며 지리산의 산신으로 여겨 매년 봄·가을 제사를 올려 여기다 神壇(신단)을 쌓았다고 한다.
  
  
   19번 國道는 國寶와 護國의 길
  
  자판기에서 「겨우」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면서 여유를 부렸던 탓인지 상점 아가씨의 눈길이 곱지 않다. 그러고 보니 경관에 홀려 상점 앞에 승용차를 「너무 오래」 세워둔 것 같았다. 밑에선 관광버스 몇 대가 물밀듯 치올라 오고 있었다. 서둘러 피아골에서 철수했다. 865번 지방도로 외곡리까지 내려오면 다시 19번 국도. 智異山과 섬진강을 끼고 있는 19번 국도는 「국보와 보물의 길」일 뿐 아니라 護國(호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피아골 입구 외곡리에서 구례읍 쪽으로 3km쯤 가면 왕시루봉 능선이 흘러내려 섬진강과 마주치는 곳에 石柱關(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이란 천연요새가 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燕谷寺의 스님 700명이 승병으로 출전, 이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때가 1593년이었다니까 晉州城(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전라도로 향발하던 왜군 부대와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쌓았던 성터도 남아 있다.
  
  丁酉再亂(정유재란:1597) 때도 燕谷寺 스님 150명이 이 지방 의병 3500명과 합세하여 방어전을 벌이다 모두 순국했다. 공격군은 慶尙右道를 휩쓸고 南原城(남원성)으로 진발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로 보인다. 石柱關에는 燕谷寺 승병들의 순국을 추념하는 碑가 서 있다. 碑文을 한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라를 위해 모병에 응하고
  
  주인을 위해 내 몸을 잊었네.
  
  중이라고 어찌 가리랴
  
  기꺼이 나라 위해 일어섰도다.
  
  핏물이 내를 이룸은
  
  한 조각 돌에 사연을 새기니
  
  그 절개 그 충정 영원하리.>
  
  이곳 선비들로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석주관 7義士」의 묘역도 조성되어 있다. 석주관에서 10여 리 달려 토지면 중심가를 벗어나면 곧 길 오른편으로 「三韓 최고의 명당」이라는 雲鳥樓(운조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가 보인다. 운조루는 甲山府使를 지낸 某씨가 지은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양반가옥이다.
  
  지리산의 줄기에 등을 대고 섬진강을 바라보는 곳이니 背山臨水(배산임수)의 지형이 틀림없겠다. 풍수가들은 이곳을 金環落地(금환낙지), 즉 금가락지가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땅이라고 한다.
  
  언젠가 19번 국도를 지나다 雲鳥樓를 지키는 후손을 만나 『明堂 자리에 사니까 富貴榮達(부귀영달)은 문제 없겠다』고 말을 건네자 그는 『官에서 지급해 주는 (문화재)유지비가 턱없이 부족한데, 손볼 데가 많아 애만 먹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雲鳥樓에서 20리쯤 더 가면 「전국 제일의 長壽村」으로 알려진 하사마을이 나온다. 과연 알뜰한 聚落(취락)을 이루고 있다. 그 앞 사도리의 모래땅은 일찍이 道詵대사가 풍수지리를 깨쳤다는 곳이다. 지금 여기엔 오이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꽉 들어차 있다. 이곳 오이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최상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노고단 주유소」 앞에서 19번 국도를 버리고 861번 지방도로 길을 바꾼다. 泉隱寺(천은사) 가는 길이다. 갑자기 길이 막혔다. 수학여행에 동원된 버스 10여 대가 상행길을 막고 주차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길 건너편에 있는 梅泉 黃玹(매천 황현: 1859~1910) 사당을 참배하려는 것 같았다. 梅泉의 저서 「梅泉野錄」과 「梧下記文」은 필자도 애독하는 역사책이다. 특히 「梧下記文」은 당대 선비의 입장에서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通史(통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1888년 생원시에 장원했으나 나라꼴이 말이 아니어서 낙향하여 저술에 전념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면서 絶命詩(절명시)를 남겼는데, 그 마지막 귀절이 가슴을 친다.
  
  <秋燈掩卷懷千古(가을 등불 아래 책 덮어 놓고 천고를 생각해 보니)
  
  難作人間識字人(문자께나 아는 사람 인간 되기 어렵구나)>
  
  梅泉 사당 입구에서 泉隱寺까지 2.7km. 천은사 입구 톨게이트에서는 1인당 2600원(문화재 관람료 1300원+관광도로 통행료 1300원)을 징수한다. 천은사에는 들르지 않고 관광도로만 이용할 사람에게도 무차별로 적용되는 요금이다. 필자 일행은 천은사 안에 발 하나 들여 놓지 않고 관광도로(861번 지방도)로 진입하면서도 5200원을 물었다.
  
  
  달궁의 돼지갈비 굽는 냄새
  
  표고 1000m의 시암재 휴게소 앞을 지나면 곧 성삼재(1090m) 휴게소. 몸이 날릴 듯한 바람 바람 바람. 맑은 날엔 구례는 물론 남원까지 바라볼 수 있지만, 하필이면 갑자기 날이 잔뜩 흐렸다. 「無泊(무박) 3일의 지리산 縱走(종주)의 시발점」인 老姑壇까지는 여기 주차장에다 차를 세워 놓고 1시간쯤 걸어야 한다.
  
  성삼재에서 심원계곡을 바라보며 15리쯤 달리면 전남과 전북이 갈라지는 道界. 道界 삼거리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雲峰 가는 737번 지방도, 동북쪽이 인월로 가는 729번 지방도다.
  
  729번 지방도를 10리쯤 따라가면 곧 달궁. 달궁계곡 끝나는 곳에서 10리를 더 들어가면 뱀사골이다. 달궁 마을을 지나니 고기 굽는 냄새가 발목을 붙든다. 이번 답사에 나서 내리 산채만 먹은 탓인지 구미가 동한다. 「정자나무집」에 들러 돼지갈비 2인분(1만4000원)으로 좀 늦은 中火를 마쳤다. 공기밥 두 그릇에 4000원, 값은 좀 비싸지만 따라나온 된장찌개가 구수했다.
  
  달궁에서 산내초등학교 앞 삼거리까지가 20리 길. 삼거리에서 우회전, 60번 지방도로 길을 바꿔 1km쯤 달리면 곧 實相寺 초입이다. 매표소를 거치면 바로 解脫橋(해탈교). 그 아래로 경호강과 合水되는 산내천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돌장승 두 기와 만난다. 「大將軍」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입은 비죽거리고 있으며, 上元周將軍은 눈알이 툭 튀어나온 데다 턱수염이 세 갈래다. 둘 모두 꽤나 무서운 상호를 하고 있는 셈이지만, 어딘가 해학을 담고 있어 매우 친근한 느낌이 든다.
  
  
  최초의 禪宗가람 實相寺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대한불교조계종 智異山 實相寺(실상사). 신라 흥덕왕 3년(828) 洪陟國師(홍척국사)가 개창한 우리나라 최초의 禪宗(선종)가람이다. 신라의 九山禪門(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사원인 것이다.
  
  洪陟선사는 迦智山門(가지산문)의 開山祖인 道義 禪師와 함께 신라 憲康王(헌강왕) 때 唐나라 西堂地藏(서당지장)에게서 정통 禪脈(선맥)을 이어받았다. 洪陟선사는 興德王의 즉위년(826)에 귀국하여 왕과 宣康太子(선강태자)를 만났다. 왕은 洪陟스님의 큰 덕을 우러러 국사로 삼았다고 한다.
  
  實相寺는 智異山 자락에 있는 사찰들 가운데 유일하게 평지에 위치한 山寺다. 天王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면 佛國寺 석가탑 相輪部 복원의 模本(모본)이 되었던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2기(보물 제37호)가 동서로 서 있다. 석등(보물 제35호)을 앞에 둔 寶光殿의 동쪽 藥師殿에는 철제 약사여래좌상(보물 제41호)이 모셔져 있다.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 앞을 지나 경내의 서쪽 담벽에 이르면 證覺大師 응료탑(보물 제38호)과 證覺大師 응료탑碑(보물 제39호)를 만난다. 이것이 實相寺의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位相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證覺大師는 實相寺의 開山祖인 洪陟國師의 諡號(시호)이며, 응료는 그 塔號(탑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眞骨 중심의 敎宗에서 禪宗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 禪師가 洪陟國師인 것이다.
  
  이곳 極樂殿(극락전:부도전)에서는 秀徹和尙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과 秀徹和尙능가보월탑碑(보물 제34호)도 있다. 秀徹和尙(수철화상)은 實相寺의 제2대 祖師이며 능가보월은 그 塔號다. 또 누구의 것인지 알려지지 않은, 古色蒼然(고색창연)한 부도(보물 제36호) 1기도 實相寺의 품격을 보탠다.
  
  實相寺의 암자에도 만만찮은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약수암에는 아미타불과 8보살, 2비구가 표현된 「약수암 목각탱」(보물 제421호), 百丈庵에는 석등(보물 제40호)과 「萬曆 12년銘 靑銅銀入絲 향로」(보물 제420호)가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간직한 實相寺는 오늘날 개혁불교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있다. 「올바른 선가상의 확립」과 「僧風 진작」이라는 목표로 출범한 비구스님의 결사인 「禪友道場(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승가전문교육기관인 2년 과정의 「華嚴學林(화엄학림)」을 개설하여 한국 불교의 미래를 이끌어갈 승가의 젊은 人材를 배출하고 있다.
  
  實相寺에선 현재 7년째 문화재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 유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수십 채에 달하는 건물의 遺構(유구)가 나타났다. 목탑지의 주춧돌만 보더라도 그 웅장한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번쩍번쩍한 「中興佛事(중흥불사)」 같은 것은 싫다. 담박하고 예스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지금 이대로 좋다.
  
  이런 의미에서 實相寺의 2층 목조 解憂所(해우소: 화장실)는 압권이다. 여기에 앉으면 눈높이에 뚫린 직사각형 문틀을 통해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장소는 달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危機一髮, 국보 제10호 百丈庵 3층석탑
  
  實相寺 宗務室에 들러 이지엄 종무실장에게 百丈庵(백장암)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그는 『외출 중인 百丈庵 스님이 오후 3시40분에 實相寺로 올 예정』이라며 『그때 百丈庵으로 동행하여 협조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늦가을의 해는 토끼 꼬리만큼이나 짧다. 마침 햇빛이 좋은 오후 2시,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해탈교를 빠져 나와 60번 지방도를 따라 인월 방향으로 3km쯤 달리면 百丈庵의 초입. 여기서 승용차 한 대가 통행할 만한 산길로 1km 남짓 오르면 된다. 지난 여름의 폭우로 산사태가 난 산길은 매우 험했다.
  
  위기일발. 국보 제10호 百丈庵 3층석탑의 바로 5m 앞까지 바윗돌와 흙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산사태의 흔적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百丈庵 3층석탑 앞에 있는 보물 제40호 百丈庵 석등도 참화를 모면했다.
  
  현재 석탑과 석등 주변의 유구는 원광대 馬百연구소가 조사중이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돌담을 두른 아담한 정원처럼 보이고 담장 위로 석탑의 상륜부가 드러나 있던 산사태 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진 황폐 그대로이다.
  
  국보 百丈庵 3층석탑은 푸르스름한 石材의 재질이 千年세월로 風化(풍화)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지리산 일대에선 나오지 않는 靑石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단단한데 충청도 어디에서 날라온 것으로 전해진다.
  
  1층 塔身 각 면에는 四天王像과 神將像(신장상) 2구씩을, 2층 塔身 각 면에는 奏樂天人像(주악천인상) 2구씩을, 3층 塔身의 각 면에는 1구씩의 天人坐像(천인좌상)을 새기고 있다.
  
  이 석탑은 新羅下代에 유행한 불국사 다보탑과 같은 異形석탑의 하나이다. 각 부의 구조가 매우 부드러울 뿐 아니라 탑신부의 塔身과 屋蓋石(옥개석) 밑까지 조각으로 가득 채워져 더욱 화사하다. 종래엔 10세기 작품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엔 9세기 석탑이라는 것이 유력해지고 있다. 日帝 때 해체 복원되면서 사리함과 經文(경문) 등이 사라졌다. 높이 5m.
  
  百丈庵 석등은 仰蓮의 윗부분에 난간을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이처럼 仰蓮臺石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것은 우리나라 석등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百丈庵은 洪陟國師가 實相寺가 창건되기 1년 전에 와서 먼저 짓고 머문 곳으로 전해 내려 온다. 현재 3층석탑 위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光明殿과 文殊殿(문수전) 등을 갖추고 있다.
  
  百丈庵을 둘러보고 왔던 길을 되짚어 實相寺 입구 解脫橋를 지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百丈庵 스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었다. 오후 3시50분 百丈庵의 潁寬(영관) 스님이 종무실에서 필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유별나게 맑은 꼿꼿한 스님이다.
  
  潁寬스님은 百丈庵과 3층석탑에 관한 얘기에서 더 나아가 祈福信仰化(기복신앙화)하는 한국 불교의 문제점, 禪宗과 敎宗이 균형 발전해야 하는 이유 등을 솔직하게 말했다. 해박한 스님을 만난 것이 기뻤지만, 갈길이 급해 다음을 기약하고 實相寺를 나섰다.
  
  
  우리 儒學의 祖宗 崔致遠이 조성한 上林
  
  60번 지방도를 통해 인월로 나와 24번 국도를 타고 팔랑재를 넘으면 경남 咸陽郡(함양군). 우리 역사에서 智異山의 品格을 드높인 孤雲 崔致遠(고운 최치원)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함양읍내로 들어 오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우선 上林 앞 별궁장 여관에 들어 하룻밤을 묵었다(1박 2만5000원).
  
  上林은 1100여년 전 孤雲 崔致遠이 함양 太守로 재직할 때 渭川(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으로 그 안엔 그의 神道碑(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人工造林(인공조림)이며 유일한 낙엽활엽수림으로 천연기념물 제154호이다.
  
  11월2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전날 개통된 孤雲橋(고운교)를 건너 上林에 들었다. 3만6000여 평의 땅에 10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무성하다. 渭川의 물을 좁은 水路(수로)로 끌어들여 물 흐르는 소리가 콸콸, 제법 세차다.
  
  자판기에서 끄집어 낸 커피 한 잔으로 속을 덥히고 오솔길 2km를 산책했다. 한 바퀴 도는 데만 40분. 산책길 중간에 文昌侯 崔先生 神道碑(문창후 최선생 신도비)가 서 있다. 崔致遠의 업적을 기려 1923년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文昌侯는 최치원의 諡號(시호).
  
  咸陽郡은 매우 문화적 센스가 있었다. 上林 서쪽편에 「역사인물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이곳에는 崔致遠을 중심으로 金宗直(김종직)·鄭汝昌(정여창)·朴趾源(박지원) 등 함양 출신 또는 이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했던 역사인물 11명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實物大(실물대)의 얼굴이어서 친밀감을 더했다.
  
  崔致遠의 발자취가 남은 곳은 上林뿐이 아니다. 함양군청 건너편에 있는 學士樓(학사루: 함양읍 상동)는 崔致遠이 함양태수로 재직할 때 자주 올라 詩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 學士樓는 엉뚱하게도 四大士禍(사대사화)의 하나인 戊午士禍(무오사화)의 출발점이 된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 초기 士林의 宗師(종사)로 명망이 높았던 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學士樓에 올랐다. 學士樓의 현판엔 柳子光(유자광: ?-1512)이 놀러왔다가 읊은 詩 한 수가 적혀 있었다. 柳子光이라면 睿宗(예종) 때 南怡(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奸臣(간신)이다.
  
  金宗直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 따위가 여기에 詩를 걸 수 있느냐』고 발끈하여 현판을 떼내어 불태워 버렸다. 柳子光은 깊은 앙심을 품었다.
  
  成宗이 죽고 「成宗實錄(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중에 柳子光이 史草에 실린 金宗直의 「弔義帝文」(조의제문)을 문제로 삼았다. 조의제문은 項羽(항우)가 楚(초)나라의 義帝를 시해한 史實을 빗대어 世祖에게 죽임을 당한 端宗(단종)을 弔慰(조위)한 글이었다. 이 글을 金宗直의 제자 金馹孫(김일손)이 史草에 올렸다.
  
  분풀이의 기회를 잡은 柳子光은 世祖를 비방한 金宗直은 대역죄인, 「金馹孫의 악독함도 金宗直이 가르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여기에 신흥 士林의 대두를 미워하던 勳舊派(훈구파)가 가세했다. 결국 이미 故人이었던 金宗直은 剖棺斬屍(부관참시:관을 쪼개어 시체를 난도질함)를 당하고, 金馹孫은 참수되었으며, 金宗直의 首弟子였던 鄭汝昌 등 많은 선비들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갔다.
  
  
  傳 駕洛國 仇衡王의 돌무덤
  
  學士樓에서 물러나 그 건너편 시장통에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요기를 하고 곧장 1001번 지방도를 탔다. 큰 재(팔두재)를 넘는 40리 길을 달리면 산청군 금서면 花溪里(화계리). 이름처럼 마을의 생김새가 예쁘다.
  
  너른 들 뒤로 智異山의 한 봉우리인 王山(923m)이 솟아 있다. 王山의 들머리길 옆에는 駕洛國(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仇衡王(구형왕)을 기려 세운 德讓殿(덕양전)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仇衡王의 영정을 모시고 봄·가을에 추모제를 지낸다.
  
  德讓殿 뒤로 난 산길을 1km쯤 오르면 傳 仇衡王陵(전 구형왕릉)이 있다. 王이 新羅軍과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자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돌 하나씩을 모아 돌무덤을 축조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돌무덤 앞에는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讓王은 나라를 잃은 王이 받는 諡號다.
  
  경사진 언덕 중턱에 7개의 층단식으로 축조된 「돌무덤」이다. 총 높이 7.15m. 이채로운 것은 앞면 넷째 단의 가운데 부분에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창틀 모양의 구조물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구조물 때문에 傳 仇衡王陵은 石塔 또는 祭壇(제단)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仇衡王이 智異山 일대에서 신라군과 싸웠다는 전설도 역사의 기록과는 맞지 않다. 더구나 신라에 나라를 순순히 양도한 仇衡王의 아들인 武力은 진흥왕 때 百濟의 중흥주인 聖王을 전사시켰고, 손자인 舒玄(서현)은 고구려軍의 南進을 막았으며, 그 증손자인 金庾信(김유신)은 신라의 眞骨에 편입되어 삼국통일 전쟁에서 수훈을 세웠다. 하필이면 水害나 산사태를 당하기 쉬운 계곡에다 陵을 축조했다는 점도 이상하다.
  
  그러나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되어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쓰여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洪儀永(홍의영)이 쓴 「王山尋陵記」(왕산심릉기)에는 가락국의 10代 仇衡王이 나라가 망하자 「이곳에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 장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어떻든 이곳엔 王臺(왕대), 水精宮(수정궁), 王山寺 등 예사롭지 않는 이름이 많다. 인근 生草面 사무소 소재지인 어서里에는 가야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이는 古墳群(고분군)도 자리잡고 있다.
  
  傳 仇衡王陵을 뒤로 하고 60번 지방도를 20리쯤 달리면 35번 고속도로의 山淸인터체인지. 3번 국도와 나란히 뻗어 있는 35번 고속도로는 智異山 동쪽 全面을 관찰하는 데 최적의 길이다.
  
  
  빨치산 비트를 복원한 山淸郡의 착각
  
  智異山은 古來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산으로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海東 三神山 중의 하나다. 신라시대엔 花郞徒(화랑도)의 수행도장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智異山을 끼고 있는 山淸郡과 咸陽郡은 智異山 共匪(공비)들의 거점이나 비트(비밀 아지트) 등을 복원하여 관광상품화하는 異常 열풍에 휩싸여 있다.
  
  智異山 공비들은 대한민국을 멸망시키겠다고 총을 든 무리이다. 지리산에 처음으로 숨어든 게릴라는 麗順 14연대 叛亂 사건의 패잔병들이었다. 정부수립에 반대한 반란부대 14연대의 主力은 토벌軍에 쫓겨 金智會(김지회·중위), 洪淳錫(홍순석·중위)의 지휘 아래 智異山으로 도주했다.
  
  1948년 11월 초순, 지리산에 거점을 굳힌 패잔병 게릴라는 일제히 분산하여 이른바 보투(보급투쟁)를 개시했다. 월동준비였다. 그들의 활동범위는 점점 확대되어 北은 덕유산 부근, 南은 남해안의 하동과 광양, 東은 진주, 西는 광주에까지 이르렀다. 이 지역 일대는 「낮은 대한민국, 밤은 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렸다.
  
  1949년 3월, 軍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와 호남지구전투사령부를 특설, 지역을 2분해서 철저한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10개 대대가 동원된 3차에 걸친 토벌작전에서 반란의 수괴 金智會와 洪淳錫이 사살되는 등 치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지리산은 또다시 빨치산의 온상이 되었다.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에서 패퇴한 북한군과 좌익 부역자들이 유엔군의 仁川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대거 입산하여 제2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은 李泰씨의 체험수기 「南部軍」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때 우리 사회에서 『咸陽·山淸 가는 길』이란 말은 『죽으러 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처절했던 시절이었다. 전방에서는 中共軍·北韓軍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智異山 게릴라부대는 후방을 교란하는 배후의 敵이었다. 1951년 11월16일, 지리산 일대 공비를 소탕하는 토벌부대로 야전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사령관은 白善燁(백선엽) 소장. 최전선에서 전투 중이던 수도사단(사단장 宋堯讚 준장)과 8사단(사단장 崔榮喜 준장)을 뽑아 후방작전에 투입했던 것이다.
  
  「南部軍」 게릴라부대의 사령관은 남로당 軍事責(군사책)이었던 李鉉相(이현상)이었다. 이듬해 1월 말 白야전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이 사실상 끝났다. 美軍公刊史에선 게릴라 9000여 명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南部軍은 소탕되었다. 李鉉相은 본부요원 몇 명과 智異山을 전전하다가 1953년 빗점골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사살된 李鉉相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그는 美軍 군복 下衣에 러닝셔츠와 운동화 차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족간의 이데올로기전쟁은 기념할 것도 없는 처참한 것이었다. 역사의 물결을 거스른 패배자 집단인 智異山 빨치산의 거점이나 비트가 관광상품화하는 풍조도 100만 大軍으로 赤化를 노리는 北韓의 존재가 상존하고 있는 한 아직도 위험한 짓이다.
  
  
  俗世
  
  智異山이 빨치산의 온상이 된 것은, 첫째 기후가 온난하기 때문이었다. 북사면의 경우 겨울 야영은 무리지만, 남쪽 기슭에선 간단한 준비만으로 야영이 가능하다. 계곡이 깊어 4계절을 통해 물이 풍부하고,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거점을 만들기 쉽다.
  
  또한 주위에 풍요한 평야가 펼쳐져 식료 등 게릴라가 필요한 물자가 모여 있었다. 게릴라는 보급투쟁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을 결행하기 쉽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보급투쟁에서는 돈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협력」이라는 명목의 약탈이었다. 인민공화국의 면장이나 우체국장을 시켜 주겠다고 꾀기도 했다. 이것에 응하지 않으면 살해당한다는 공포 때문에 물자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것만으론 몇 년 계속될 수 없다.
  
  역시 민중 속에서 협력분자가 있었던 것이다. 게릴라 활동에는 거점 확보와 민중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富의 편재에 의한 불만 때문에 게릴라들을 지원했다. 사회적 평등이 확립되지 않는 한 유사시 게릴라의 온상을 무력화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12시 정각, 晉州에 원위치하여 렌트했던 승용차를 반환했다. 3박4일 동안 950km를 달렸다. 진주 중앙시장 안에 있는 제일식당에서 가오리 회와 막걸리를 곁들인 해장국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全斗換·盧泰愚씨가 대통령 재직 당시 이 식당에 들렀을 때 촬영된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을 보고야 俗世(속세)로 되돌아온 사실을 실감했다. 오후 2시20분 터미널로 되돌아와 上京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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