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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검찰, 사헌부
 관리자  07-25 | VIEW : 3,511
조선의 검찰, 사헌부

임금과 사헌부 수장도 잘못하면 탄핵했다

「조선의 검찰」인 사헌부는 임금이 월권할 경우 거침없이 탄핵했다. 또 자기 조직의 수장이 과거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면 바로 파직시켰다. 사헌부는 남을 단죄하는 위치에 있으니만큼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기 떄문이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 종기 변호사 수임비리 사건으로 촉발된 법조 비리 문제는 사법계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법계가 다루는 분야가 법이라는 점에서, 사법계에 대한 현재의 불신은 「법치(法治)」에 대한 불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법치국가인가. 법치국가란 한마디로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국민 상당수는 우리 사회가 법 앞에서 그리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법은 광복 이후 줄곧 권력자의 편에 서왔다는 혐의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법치보다는 인치(人治)가 우위인 사회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왕으로 상징되는 「인치국가」, 즉 왕조국가의 사법제도는 어떠했을까. 우리는 흔히 왕조국가의 사법제도와 사법권은 지금보다 훨씬 권력자의 편에 섰으며, 그 행사도 자의적이고 편파적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물론 왕조국가의 사법체제가 현대국가의 사법체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부분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법 현실보다 나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명도 법 아래에 있다

TV 역사드라마를 보면 조선왕조에서는 임금의 「어명(御命)」 한 마디가 모든 논리를 무시하고 초월하는 힘을 가진 사회였던 양 묘사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사법체제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자의(自意)가 아니라 엄격한 법률적 근거 아래에서만 어명을 내릴 수 있었다. 오늘날처럼 「성공한 쿠데타는 단죄할 수 없다」던 사법기관의 법리가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의해 아무런 논란 없이 뒤집히는 사건은 조선 시대에는 생길 수 없었다. 국왕이라고 해서 법 위에 있을 수는 없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선은 명문화된 법전 테두리 내에서 통치권이 행사되던 체제였다.
조선의 기본법전은 조선 건국 약 1세기 후인 성종 16년(1485)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이었다. 경국대전은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던 여러 법전들을 수정·보완하여 만든 법전이다. 조선 법전의 시초로는 태조 3년(1394)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꼽을 수 있다. 『조선경국전』은 주나라 제도인 「주례(周禮)」를 이상으로 삼고, 역대 중국의 제도를 절충한 다음, 조선의 현실을 가미해 만든 독자적인 법전이었다. 그런데 편찬자인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주살된 후에는 조준(趙浚)이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과 병행 사용되었고, 그 후 태종 7년(1407)의 『속육전(續六典)』, 세종 15년(1433)의 『속전(續典)』이 그 미비점을 보완한 형태를 갖춰 사용되었다. 그러다 통합 법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세조가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비로소 완성된 법전이 바로 『경국대전』이다. 그리고 조선 국왕의 어명은 이런 법전의 테두리 내에서만 내려질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사법기능은 분산돼 있었다. 의금부(義禁府), 형조(刑曹),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등이 그것이다. 그중 핵심적인 기관이 의금부와 사헌부였다.
두 기관에 대한 『경국대전』의 명문 규정은 두 기관의 성격이 다름을 보여준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는다』고 돼 있고, 사헌부는 『시정(時政)을 논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협잡을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돼 있다. 이는 의금부가 국왕에 더 가까운 기관이고 사헌부는 백성에 더 가까운 기관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양 기관이 상호 견제하는 기능이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 형조는 『형조의 상복사(詳覆司)는 사죄(死罪)를 상세히 복심(覆審)하는 사무를 맡고, 고율사(考律司)는 법령 및 사건 검찰을 맡으며, 장금사(掌禁司)는 형옥(刑獄)과 금령(禁令)에 관한 일을 맡으며, 장례사(掌隸司)는 노비와 포로에 관한 일을 맡는다』고 명문화돼 있다. 이런 사법제도를 현재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의금부는 지금의 국가정보원과 그 기능이 비슷하고, 형조는 법무부와 비슷하며, 사헌부는 검찰·감사원·언론기관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각 사법기관 수장의 직급도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 수장인 판사(判事)는 종1품이고, 형조 수장인 판서는 정2품인 데 비해,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으로 의금부 판사나 형조판서보다 1∼2등급 낮게 책정됐다. 그러나 영향력을 비교해볼 때 사헌부가 훨씬 막강했다. 이는 사헌부의 업무상 특성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소속 관원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 임금과도 싸워가면서까지 자기 할 일을 다했기 때문이다.

임금에게 직언하는 사헌부 관리들

사헌부는 대사헌 1명과 종3품 집의 1명, 정4품 장령 2명, 정5품 지평 2명, 그리고 정6품 감찰 24명 등 총 30명의 관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중인 계급인 집행 아전들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권력자들을 벌벌 떨게 만든 핵심 구성원이었다. 사헌부는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불법이나 월권 사실이 발견되면 거침없이 탄핵했다. 이들은 원칙에 관한 한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결코 물러서지도 않았다. 심지어 국왕조차 탄핵했다.
북방개척의 영웅으로 유명한 김종서는 무장(武將)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사헌부에서 잔뼈가 굵은 문신이었다. 그는 사헌부 감찰과 집의 시절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 거침없는 탄핵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사헌부 집의로 있던 세종 10년(1428), 양녕대군이 좌군비(左軍婢) 윤이(閏伊)와 사통(私通)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가 보여준 태도는 사법관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원래 태종은 자신의 사후에 양녕이 도성 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유명(遺命)을 남겼다. 자칫 세종의 왕위가 위태로울 수도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성 출입을 금지당한 양녕이 도성에 들어오고, 게다가 사통까지 한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였다. 당연히 김종서는 사헌부 관리들과 함께 한때 세자였으며 세종의 친형인 양녕을 탄핵했다. 그러나 세종은 정리상 이를 물리쳤다. 이때 양녕은 세종에게 이 사건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해주지 않으면 『전하와 영원히 이별입니다』라고 강경하게 대응해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세종이 양녕 탄핵과 관련해 『다시 말하지 말라』고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서는 양녕대군을 국문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세종은 이를 형제간 우애로 본 데 비해 김종서는 군신간의 법적인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여하간 이 문제를 두고 세종과 김종서를 비롯한 사헌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사헌부가 무려 15차례 이상이나 이 문제를 간쟁하자 화가 난 세종은 사헌부 관리들을 갈아치워 이 사건을 잠재우려 했다. 세종의 이런 뜻은 대사헌 김맹성을 형조참판으로, 김종서를 한직인 전농윤(典農尹)으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김맹성과 김종서 등 사헌부 관리들을 대거 의금부에 가두라고 명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고려의 왕족인 왕거 아내의 친척들이 나누어쓴 미곡을 추징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양녕대군에 대한 끊임없는 탄핵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세종의 엄명을 받은 의금부는 평소 경쟁관계에 있던 사헌부 수장들이 잡혀오자 매우 강한 처벌을 주청했다. 의금부는 김맹성과 김종서에게 장 90대를 친 후 직첩을 회수하고 수군(水軍)에 충원하라고 요구했다. 수군 충원은 사대부에서 천민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이어서 매우 중한 벌이었다. 김종서는 비록 수군에 충원되지는 않았으나 장 80대를 맞았으며, 김맹성은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관직만 빼앗겼다.
사실 세종은 김종서에게 곤장을 칠 정도로 분노했지만 김종서의 간언이 충성에서 나온 것임도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이 다음해에 김종서를 국왕 비서관격인 승정원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임명한 것은 세종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준다. 한편으로 세종이 김종서에게 곤장을 친 사실은 사대부를 존중했던 임금도 분노할 정도로 사헌부의 간쟁이 거침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조선의 사헌부가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이렇게 국왕에게 맞서면서까지 원칙과 정의실현의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헌부는 상대를 가려가면서 간쟁하지 않았다. 세종처럼 사대부를 존중한 임금뿐만 아니라 칼로 권력을 잡은 태종에게도 사헌부는 거침없이 간쟁했다. 심지어 죽은 대신들의 뼈를 갈아 날려버린 폭군 연산군 앞에서도 사헌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폭군 연산군과 사헌부의 대결

연산군은 성리학 사회인 조선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자신의 향락생활을 비방했다 해서 성균관을 옮겨버리고 대신 그곳을 놀이장소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던 임금이다. 그는 군신(君臣)합의체 사회인 조선의 통치체제를 완전히 무시했다. 국왕과 신하가 학문과 정사를 논하는 경연(經筵)을 싫어했으며, 재위 4년에는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권경유 등 사관(史官)들을 사형에 처했던 공포정치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런 연산군이 사헌부·사간원의 간쟁을 싫어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사헌부는 연산군 6년 5월 상소를 올려 『전하께서는 학문을 높이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고, 간쟁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세 가지 일에 있어서는 천심(天心)을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라며 비판했다. 바꾸어 말하면 연산군은 정사에 게으르고, 학문도 높이지 않으며, 간쟁도 싫어하는 못된 군주라는 신랄한 비판이었다.
연산군은 날이 갈수록 황음하는 정도가 심해졌다.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 미녀들을 뽑아 들였고, 궁궐 근처 민가를 헐어 연락 장소로 삼으려 했다. 이쯤 되면 임금이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인데도 사헌부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연산군 9년 11월 사헌부는 상소를 올렸다.

『지금 궁궐 담장 밖의 가까운 인가(人家)를 철거하는 곳이 무려 백여군데나 됩니다. 조종조 이래로 두 대궐 담장 밖에 인가가 즐비했으나 다만 한 발 가량의 땅만 막아서 연기와 불이 통하지 않게 하였을 뿐입니다. 선왕인들 어찌 궁궐의 규모를 더 크게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만, 백성들이 옮겨가는 것을 염려하여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토지와 인민은 모두 나의 소유이니 옮긴들 무엇이 손상되고 헐어낸들 무엇이 해로울 것인가 하여 백년 동안이나 편안히 살던 인가를 하루에 헐어버리고 돌보지 않는다면, 선왕께서 백성들을 보호하시던 의사를 본받는 데 있어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거처를 옮기는 것은 중한 일로 인정에 꺼리는 일인데, 나의 담과 집이 헐리고 나의 처자가 얼면서 집을 잃고 뜻을 잃어 갈 곳이 없어진다면 그 고생스럽고 한탄스러운 형상을 어찌 일일이 성상께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의금부에 하옥된 사헌부 수뇌

한편 연산군의 애첩인 숙원 장녹수는 그 위세가 정승보다 높아 이웃집을 강제로 철거해 대지를 넓히기도 했다. 이때도 사헌부는 불가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재위 10년 3월 사헌부 대사헌 이자건(李自健), 대사간 박의영(朴義榮), 집의 권홍(權弘), 사간 강숙돌(姜叔突), 장령 이맥(李陌)과 김근사(金謹思), 지평 김인령(金引齡)과 김철문(金綴文), 정언 김관(金寬) 등 사헌부 수뇌 전부를 의금부에 하옥시켜 국문하게 했다.
그런데도 사헌부가 간쟁을 멈추지 않자 재위 11년 1월에는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혁파시키고 대제학 김감(金勘)에게 혁파문을 짓게 했다. 그 혁파문을 보면 사헌부·사간원에 대한 연산군의 시각을 알 수 있다.

『사헌부·사간원은 시비를 가려 논박하고 잘잘못을 간쟁하여 바로잡는 것이 책임이지만, 직책이 낮은 신진 무리가 혹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 관리) 줄에 끼면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고서 거리낌없이 맞서 말하고 비밀을 따져 드러내는 것을 일삼고… 임금의 특은(特恩)으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말할 바가 아니거늘 또한 감히 논박하니, 이 버릇을 길러 마지 않으면 임금을 손 위에 놓고 정사(政事)가 대각(臺閣:사헌부·사간원)에 돌아가게 되리라』

연산군은 이 혁파문을 『판(板)에 새겨서 뒷사람에게 보이라』고 전교할 정도로 사헌부와 사간원을 싫어했다. 연산군은 이때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혁파하고 이들이 갖고 있던 관리 서경권까지 없애버렸다. 서경(署經)이란 이조에서 추천한 관리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인사청문회와 같은 제도다.
그러나 법을 무시한 전횡을 일삼던 연산군은 지평을 혁파한 다음해에 중종반정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사헌부 지평은 다시 부활한다. 연산군 같은 폭군에게도 간쟁을 멈추지 않았던 사헌부의 「빛나는 전통」이 사헌부에 대한 신뢰와 존경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던, 법과 원칙에 대한 신념이 조선 사헌부의 진정한 권위였다.

깨끗하니까 거침없이 탄핵해

몇 년 전 슬롯머신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대전고검장이던 이건개씨가 정덕진 형제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자 국민 여론에 떠밀린 검찰은 할 수 없이 그를 구속했다. 당시 언론은 검찰의 분위기를 『우리 손에 우리 피를 묻힌 마당에 거칠 것이 없다. 걸리면 누구든지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전했다. 이는 한국의 검찰이 국민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이 아니라 자기 조직과 조직원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임을 드러낸 표현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데 조선의 사헌부는 남을 단죄하는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했다. 태종 13년(1413) 사헌부는 한 사람의 파직을 주청한다. 현재의 검찰이 알면 까무라칠 일인데, 그 대상자가 다름 아닌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안성(安省)이었던 것이다.
사헌부가 자기 조직의 수장에 대해 파직을 요청한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그가 전라도에 있을 때 사랑하던 완산(完山) 기생 옥호빙(玉壺氷)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다시 불렀는데 기생이 부상(父喪)을 당해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또 참지의정부사가 되어서는 총제(摠制) 이징(李澄)의 첩인 의녀(醫女) 약생(藥生)과 간통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애교」로 눈감아줄 수도 있는 사안인데, 사헌부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볼 점은 사헌부의 파직 요청이 외부 압력이 아닌 사헌부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란 점이다. 이렇게 조선의 사헌부는 스스로를 깨끗이 한 후 남을 공박했다. 자신에게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사헌부의 자체 정화의지가 이렇게 준엄하다 보니, 사헌부의 공박을 받은 관리들은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공직 사회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중종 10년 윤4월에는 홍문관 부제학 신상, 직제학 김안로 등이 사헌부의 논박을 받자 재직하기가 미안하다며 사직한 것을 비롯해, 조선에서는 사헌부·사간원의 논박을 받으면 스스로 사직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됐다.
조선 13대 임금 명종은 12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모후 문정왕후가 대리청정했다. 문정왕후는 명성황후와 비견되는 여걸이기도 하지만, 나라에 해를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사대부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저주했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 일파에게 권력을 주었는데, 이들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 사림파를 대거 학살하였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중용해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는 진기한 기록을 남길 정도로 불교를 숭상했다. 성리학 사회인 조선에서 억압받아오던 불교는 문정왕후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던 이때에 일시적으로 부흥의 기운이 일었다. 문제는 권력의 비호를 받은 불교계 일각에서 불법행위를 자행했다는 점이다.

백성의 편에 서서

문정왕후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명종 8년(1553) 용문산 상원사(上院寺) 주지승 신회(神會) 등이 왕후가 복을 비는 내원당(內願堂)이라는 핑계로 지평(砥平)에 사는 김귀진(金貴珍) 등의 전지(田地)를 뺏고 민가 7호를 협박해 철거하려 했다. 이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하자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 서리들이 이 땅을 측량했는데, 절에 속한 사위전(寺位田)이라고 하여 절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아가 이들 내수사 서리들은 땅을 빼앗긴 김귀진 등을 잡아다 조사하고 중죄를 가하려 했다.
김귀진 등이 마지막 수단으로 사헌부에 호소하자 사헌부는 즉각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결과 사헌부는 『주지 신회가 양민을 침학하고 흉계를 자행한 것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이들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다른 자들도 서로 다투어 백성들의 민전(民田)을 빼앗을 것』이라고 한탄하면서 『그 땅은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신회 등은 끝까지 추고하여 치죄하라』고 주청했다.
당시 국왕 명종은 문정왕후의 위세에 눌려 있는 형편이어서 사헌부의 주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가만히 물러날 사헌부가 아니었다. 사헌부가 거듭 신회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자 화가 난 문정왕후는 사헌부 지평을 신여종(申汝倧)과 목첨(睦詹)으로 갈아치워 계속 논란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사헌부가 백성의 편에 선 예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헌부는 선조 9년 나주 판관(羅州判官) 윤사흠(尹思欽)이 세금을 함부로 걷어 백성들을 괴롭혔다며 파직을 요청한 것을 비롯, 선조 21년 윤6월에는 문의 현령(文義縣令) 이맹연(李孟衍)이 작폐가 심하다며 파직할 것을 요청했고, 광해군 1년 1월에는 경산 현령(慶山縣令) 이홍발(李弘發)과 성천 부사(成川府使) 이경천(李慶千)이 탐학하여 가는 곳마다 재물을 탐한다며 파직할 것을 요청했다. 이처럼 사헌부의 그물에 걸리면 예외가 없었기에 조선의 관리들은 스스로 부패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사헌부는 권세가의 일을 탄핵했는데도 국왕이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관직을 내던지기도 했다. 인조 6년 6월에는 선조의 서자인 경평군(慶平君)이 형구를 마당에 차려놓고 유생과 백성들을 잡아와 보물을 감추어두었다는 트집을 잡아 마구 매질을 해 가산을 빼앗은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는 경평군의 궁노(宮奴)를 잡아다 진상을 조사했다.
선조의 종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내쫓고 즉위한 인조는 선조의 서자를 탄핵하려는 사헌부에 화를 냈다. 그러자 사헌부의 대사헌 홍서봉(洪瑞鳳)과 집의 조방직(趙邦直), 장령 김영조(金榮祖)·고부천(高傅川), 지평 이성원(李性源)·오단(吳端) 등은 모두 사직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항의했다. 이들은 사직하면서 인조에게 이렇게 항의한다.

『법관(法官)의 임무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마 죄 없는 외방의 유생이 궁가(宮家)의 사옥(私獄)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서도 구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는 결국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헌부와 경호부대의 대결

조선시대 사헌부의 권한은 막강했다. 태종 3년 사헌부 관리들과 궁궐수호부대원인 갑사(甲士)들 사이에 있었던 충돌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 해 11월 갑사들이 신문고(申聞鼓)를 쳐 태종에게 호소했는데 그 발단은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봉상주부(奉常注簿) 하연(河演)이 갑사 양결(梁潔) 등에게 『갑사의 직책이 낮고 천하니, 어찌 세음자제(世蔭子弟)가 할 일이냐?』고 희롱하자 분개한 갑사가 하연에게 보복하려 했다. 백관들이 조회를 파하고 흩어질 때 이천생(李天生) 등 갑사 10여 명은 사헌부 감찰 신계삼(辛繼參)을 하연으로 잘못 알고 구타했다. 사헌부 서리가 이를 힐난하자 그까지 구타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부대원들이 부장 검사를 엉뚱한 인물로 오인해 구타한 것이다. 억울하게 얻어맞은 신계삼이 사헌부에 이 사실을 고했고, 장령(掌令) 이관(李灌)이 갑사를 잡아 조사했다. 그러자 갑사 500여 명이 대궐 뜰에 나와서 하소연했다.
『지금 갑사가 감찰을 범했다 하여 구박(拘縛)함이 너무 심하니, 궁문(宮門)을 지키는 갑사를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태종은 사헌부와 갑사 모두의 죄를 묻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하려 했다. 그는 사헌부 장령 이관을 불러 『갑사를 너무 심하게 구박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때 무장인 조영무는 사헌부를 편드는 듯한 태종의 일처리에 불만을 품고 『갑사가 모두 사헌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라고 고하면서 갑사를 두둔했다. 태종이 『작은 일을 가지고 사헌부를 책망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자, 조영무는 『갑사들이 떼를 지어 고소(告訴)하였습니다』라고 갑사들의 집단행동에 의의를 부여했다. 이 말에 태종은 화를 냈다.
『경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만일 갑사가 떼를 짓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나도 역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사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 것이다. 갑사가 사헌부의 아전과 싸웠다면, 마땅히 모두 순금사(巡禁司)에 가두어 시비(是非)를 분변해야 할 것이다. 내가 들으니, 전일에 갑사들이 하연의 집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하니 비록 한 칸(間) 집이라도 어찌 파괴할 수 있는가? 갑사의 잘못이 크다』
소수의 사헌부가 무력을 지닌 다수의 갑사와도 두려움없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사헌부가 사법기관이기 때문이었다. 사법기관이 갑사라는 군대조직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는 점은 그만큼 조선이 법치국가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헌부와 의금부의 견제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다. 사헌부의 권한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조선은 그 전횡을 우려해 견제장치를 만들었다. 사헌부와 의금부·형조, 사헌부와 사간원을 서로 견제시켜 권력의 남용을 막은 것이다.
사헌부에 대한 가장 큰 견제기관은 의금부였다. 조선의 역대 국왕은 사헌부에서 거듭 간쟁하면 이들을 의금부에 보내 조사하게 했다. 앞서 세종이 김종서를 의금부에 보낸 것도 그런 예다.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은 대간에서 공신책봉이 잘못되었다고 거듭 간쟁하자 이들을 의금부에 내려 추문토록 명하기도 했다. 이 경우 국왕은 언로(言路)를 봉쇄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사헌부 관리들 역시 거듭 간쟁하면 이처럼 의금부에 하옥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이 법이고 원칙이기 때문이다.
의금부로 하여금 사헌부를 견제하게 한 것은 사헌부의 예봉을 꺾으려는 왕조의 저의가 개입돼 있지만, 거기에는 사헌부의 전횡과 부패 예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간원은 때로는 사헌부와 합동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헌부를 견제하기도 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의 직무가 『왕에게 간쟁·논박하는 일을 맡는다. 모두 문관을 쓴다』고만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 요즘으로 치면 언론기관인 셈이다. 그 인원은 정3품 대사간 1명과 종3품 사간 1명, 그리고 정5품 헌납 1명, 정6품 정언 2명 등 모두 5명으로 구성된 초미니 부서였다.
그러나 언론기관 사간원은 두려움 없이 사헌부·의금부와 맞서 싸웠다. 태종 2년 1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서로 탄핵하는 일이 있었다. 태종이 안렴사 김분(金汾)의 참소를 듣고 사헌부 장령 박고를 견책하는데도 사간원 헌납 김첨(金瞻)이 바르게 간하지 못했다고 사헌부가 비판하자, 발끈한 사간원이 사헌부를 탄핵하고 나선 것이다. 태종은 양 기관의 싸움에 사헌부의 편을 들어 좌사간(左司諫) 진의귀(陳義貴) 등을 지방에 안치(安置)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두 기관은 서로의 잘못을 찾아내기에 주력했다. 이처럼 상호 견제시키려던 의도가 두 기관의 감정싸움으로 비화하자 태종은 대사헌 이지(李至)와 좌사간(左司諫) 최긍(崔兢) 등 두 기관의 수장을 모두 면직시키기도 했다.

분경을 금지시키다

조선이 사헌부와 사간원·의금부를 상호 견제시킨 것은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만 본받을 만한 장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헌부·사간원 그리고 의금부는 상대방이 탄핵할 것이 두려워 모든 것을 법대로 처리하려 애썼고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힘썼던 것이다.
현재 한국 검찰은 기소독점주의라는 막강한 독점 권한을 갖고 있는 반면,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전무하다. 과거 정권 시절 야당의 단골메뉴였던 특별검사제가 현재도 거듭 제기되는 것은 검찰의 기소독점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말해주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여하간 사법기관 상호간에 견제시켰던 조선의 제도적 장치는 현대 사법제도에서도 반드시 구현해야 할 장점일 것이다.
조선의 사헌부에 맡겨진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분경(奔競)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분경이란 엽관운동을 위해 권세가의 집을 찾아 다니는 것, 즉 인사청탁 운동을 말한다. 태종은 재위 1년 5월 사헌부에 명을 내려 분경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무신(武臣)의 분경은 삼군부(三軍府)에서, 문신의 분경은 사헌부에서 금하게 한 것이다. 사헌부와 삼군부에서는 아전을 시켜 권세가의 문을 지키고 있다가 방문자의 존비(尊卑)와 그 까닭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인사철만 되면 고위공직자의 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인사권을 지닌 사람과 어떤 명목이든 사적 접촉을 금지한 조선의 조치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능력이 있는데도 연줄과 돈이 없어서 승진에 누락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조선은 분경이 횡행할 경우 그 책임을 사헌부에 돌릴 정도로 분경에 강력히 대응했다. 조선 8대 임금 예종이 선전관을 보내 분경을 적발하게 한 결과,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朴徐昌)이 보낸 김미(金美)가 고령군 신숙주(申叔舟)의 집에서 체포되고,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이 보낸 사람이 우의정 김질의 집에서 체포되는 등 분경이 여전히 성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종은 이를 사헌부의 직무태만으로 보고 사헌부 지평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가둬 그 죄를 물었다.

사헌부가 정쟁에 휘말렸을 때

사헌부는 그 권한이 막강한만큼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당쟁이 심해지면서 사헌부는 특정 당파의 이익추구 기관으로 변모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선조 11년 10월에는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가 합동으로 윤두수(尹斗壽)·근수(根壽) 형제를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이때는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즈음이었는데 당시 동인의 종주였던 부제학 허엽(許曄)이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양사를 시켜 서인의 중진인 윤씨 형제를 탄핵하게 한 것이다. 이들이 탄핵당한 죄목은 진도군수 이수(李銖)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서인 대사간 김계휘는 무고라며 맞섰다. 사건의 진상에 관한 논란이 일자 동인 사헌부 장령 이발(李潑)은 물증을 잡기 위해 윤두수가 진도군수에게 받은 쌀을 감춰두었다는 혐의를 받은 시장 상인 장세량(張世良)을 사헌부로 잡아와 엄히 문초했으나 끝내 물증을 찾아내지 못했다. 선조는 사헌부가 당파적 입장에서 일을 편파적으로 처리한 것이라 판단하여 장세량을 석방했다. 이처럼 사법기관이 국가나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 당파의 이익에 복무할 때 그 폐해는 큰 것이었다.
당쟁이 격화된 조선 후기 숙종 14년(1688)에는 옥교(屋轎:지붕 있는 가마)를 탄 장희빈 모친을 사헌부에서 끌어낸 사건이 발생했다. 천인 출신인 장희빈의 모친이 옥교를 탔다는 이유로 사헌부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가 사헌부 금리(禁吏)에게 명해 장희빈 모친을 끌어내게 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왕자를 낳은 장희빈의 산후 조리를 위해 국왕의 전교를 받고 궁중에 들어오던 중이었다.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장희빈 모친을 끌어낸 표면적 이유는 그녀의 신분이 옥교를 탈 수 없는 천인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제 이유는 장희빈이 집권 서인의 반대당파인 남인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록 천인이었지만 딸이 정1품 빈(嬪)의 신분이었으므로 단순한 천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유일한 왕자의 외할머니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반 천인과는 달랐다. 사헌부의 이런 대응은 당파적 감정이 깊숙이 개입된 것이었다. 숙종 때 서인과 남인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전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법기관인 사헌부마저 당파적 관점에서 사건을 처리했으니 말이다.
감정의 충돌을 억제할 수 있는 유력한 장치인 법이 감정에 휩싸일 때의 폐해를 숙종 때의 당파간 살육전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법기관의 정치적 독립이 한 기관과 한 당파의 차원을 넘는 국가 전체의 존망과 연결되는 문제임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우리 국민들이 사법기관에 대해 느끼는 불만 중의 하나는 사건이나 소송 처리기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다. 특히 선거법 위반 등 이른바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의 경우 임기가 거의 끝날 때쯤에나 판결을 내리거나 임기를 마친 후에야 처리돼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형률 처리 기한

조선 시대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담당자는 즉각 문책감이었다. 『경국대전』의 「범죄사건 처결의 기한(決獄日限)」 몇 구절을 살펴보자.

『무릇 범죄사건을 처결할 때에는 큰 사건(사형죄)은 30일, 보통 사건(도형과 유형)은 20일, 작은 사건(태형과 장형)은 10일로 한정한다(문건이 다 갖추어지고 증인이 도착한 날부터 계산한다). 증인이 다른 곳에 있어 반드시 그를 기다려 규명해야 할 사건은 원근의 거리를 따라 왕복일수를 빼놓고 역시 기한 안에 판결을 끝마쳐야 한다. 만약 서로 연관되어 부득이 기한을 넘기게 되는 것은 사유를 자세히 적어서 임금에게 보고한다(소송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부터 아내냐, 첩이냐, 양인이냐, 천인이냐 하는 것과 같이 인정상으로나 이치상으로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서 잘못 판결한 것은 즉각 다른 관청에 제소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나머지는 판결한 당상관과 방장(房掌:보조자)이 교체된 뒤에 다시 제소를 제기하되, 교체된 뒤 2년이 지나서도 제소하지 않은 사건은 심리하지 않는다.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 판결한 자와 사건을 질질 끌면서 지연시킨 자는 장형 100대에 처하고 영영 채용하지 않는다(대사령이 내리더라도 채용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는 왕조시대라는 굴레에서도 매우 합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억울한 판결을 당했을 경우 절박한 문제는 즉각 다른 관청에 제소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 있었으며, 그 외의 사건은 판결 담당자가 교체된 후에 그 기관에 다시 제소할 수 있었다. 만약 뇌물 등을 받고 오판했을 경우 판결자는 장형 100대를 맞고 영영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새 임금의 즉위 등 경사가 있을 때 으레 행하는 대사면령이 내리더라도 이런 사람은 채용되지 않았으니 그 엄정함을 알 수 있다.
판·검사 시절 문제를 일으켜 법복을 벗어도 전관예우라는 괴상한 특혜를 받는 우리 사법계의 현실은 조선의 사법계보다도 뒤떨어진 윤리관·도덕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이 정의의 표상이 되고 사법기관이 그 정의의 수호신이 되는, 그야말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바람일까? 진정한 법치사회에 대한 믿음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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