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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최고의 천재화가 吾園 張承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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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07-25 | VIEW : 4,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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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천재화가 吾園 張承業
“그의 필치는 疎放하고 자연스러운 가운데 그윽한 운치가 있다”
글·이재광 월간중앙 학술전문기자
안견·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 천재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조선 최고의 화가일 것이다. 그러나 140점의 그림 외에는 그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과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는 미스터리 속의 인물이다. 조선의 3대 화가 중 가장 최근 인물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口傳하는 일화 중심의 그의 행적들은 천재들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온갖 기행괴벽의 종합판이라 할 만한 내용들이어서 천재화가 장승업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한다.
소년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머리 속으로 숱한 영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매화꽃이 보였는가 하면 어느새 새 한마리가 푸드득 날아와 앉았다. 매화 주변에는 나비떼들이 돌아다녔다. 시선을 돌리니 이번에는 작은 계곡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곡 저편에는 소나무가 힘차게 하늘로 뻗어 있었고 기암괴석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작은 선율을 이루며 조용히 계곡 사이를 흐르는 냇물….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는 어느덧 황홀경에 빠져드는 듯 보였다. 눈을 떴다. 그리고 붓을 들었다. 단 한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던 소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먹을 듬뿍 묻혀 거침없이 화선지를 메우기 시작했다. 방금 전 머리 속에서 노닐던 새와 나비·매화·소나무·계곡과 기암괴석들이 꿈틀거리며 종이 위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소년의 눈에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광채가 흘러나왔고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손놀림은 빨랐다가 천천히 하기를 반복했다.
그림 그려야 평온 찾는 머슴살이 소년
일필휘지(一筆揮之). 흥이 나서 단숨에 붓을 놀려 글을 써내려 간다는 이 표현이 그림에도 적용된다면 바로 그에게 붙일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너무 집중했기 때문일까. 단숨에 10여폭의 그림을 휘갈겼던 소년은 종이 위에 붓을 떨군 채 그대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소년에게 그림은 사치였다. 천애고아로 떠돌다 간신히 남의 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며 문간방 신세를 져야 했던 그였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머슴으로서는 그림 한 점 제대로 볼 기회마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뭔가를 그려야 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슨 신기(神氣)가 그를 사로잡았다. 주인이 불러 안방에 들어가면 벽에 붙어 있는 산수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렇게 본 그림들은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그림 속의 선인(仙人)이 그를 찾았고, 새와 사슴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스스로 ‘환쟁이 귀신이 붙었나’하고 의심해 봤지만, 의심은 의심에서 끝날 뿐 몸속 어딘가에서 꿈틀대는 ‘끼’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결국 실행에 옮긴 것이다.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상한 기운이 이끄는 대로 손을 놀렸다. 소년이 어디서 어떻게 화구(畵具)를 얻어왔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품삯으로 받은 푼돈을 들여 샀는지 혹은 누군가가 주었는지…. 어쩌면 그를 감도는 신기가 그에게 화구를 훔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시켰다. 일단 그렇게 해서 소년의 마음은 잠시 평안을 찾았다. 하지만 한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하면 할수록 소년은 ‘그짓’을 해야 했다.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일에 지친 몸이었지만 일과가 끝나면 소년은 미친 듯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 그냥 잠이 들었다. 잘됐다고 생각되는 것은 벽에 붙여 두고 보기로 했다. 머슴살이 소년으로서는 자칫 치도곤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도대체 이 그림은 어디서 났느냐?”
결국 소년의 과한 행동은 들통이 났다. 우연히 방을 둘러본 주인은 소년이 그림을 어디서 훔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소년은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이 직접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주인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주인은 소년의 거짓을 밝히기 위해 직접 그려 볼 것을 주문했다.그러나 이실직고(以實直告)를 기대했던 주인의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소년은 직접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됐다.
천재 소년－. 지금 생각해 봐도 주인이 소년에게 ‘천재’라는 호칭을 붙여줬을 것으로 추정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체계적인 교육은커녕 제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소년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탄성을 올렸을 것이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은 이로써 자신의 예술혼을 만개시킬 계기를 마련했다. 주인은 “하늘이 돕는 것으로 알라”며 종이와 붓과 벼루를 선물로 줬다. 또 모든 잡무에서 빼 주고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오원은 주인의 말대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감사해야 할 것은 하늘이 줬던 그의 재능이었다. 주인이 그를 어여삐 여기지 않았어도 하늘이 부여해 준 천재적 재능은 언젠가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오원의 재능은 그만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시공을 초월할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밑바닥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의 예술혼은 똑같이 꽃을 피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말기 애국지사이자 언론인이었던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이 묘사한 이때의 상황은 오원의 천부적 재능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준다.
“신(神)이 모이고 뜻이 통했다.평생에 붓대도 쥘 줄 몰랐는데 하루는 붓을 잡고 손이 시키는 대로 휘갈겨 대나무·매화·난초·기암괴석·산수·새·동물 등을 그려 봤다. 그리고 보니 모두 자연천성(自然天成)하여 신운(神韻·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떠올랐다. 주인은 보고 깜짝 놀라며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이냐,고 물었다. 승업은 사실대로 말했다. 주인은 ‘신이 도우는 일’이라며 종이와 붓·먹을 장만해 줬고 그림에 전념하도록 해줬다. 그로부터 화명(畵名)이 세상에 날려 사방에서 그림을 청하는 이가 줄을 이었다.”
“이를 일컬어 가히 神品이라 하는가 보다”
현대 독자들은 옛날 인물들에 대한 웬만한 이야기들은 믿지 않는다. 그냥 옛날 얘기일 뿐이다. 실제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다반사다. 웬만한 인물들은 대부분 태몽을 꿨고, 어린 나이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같은 일들을 해낸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괴이한 선행과 예언들이 나오고, 죽은 후에는 신선이 됐다는 기담(奇談)도 많다. 왜곡되고 과장됐으니 신화요, 전설이다. 그래서 오원에 대한 과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추상 회화나 조형물에 낯익은 독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적이고 심심하기까지 한 동양적 산수화를 연상하는 독자들은 별 것 아니라고 받아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준’‘신이 내린’ 등의 표현에 식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한말 터럭만큼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던 역사가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찬사는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매천의 붓 아래에서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고까지 했던 그였다. 그가 칭찬한 사람은 기껏 망국의 시기에 목숨을 끊었던 몇몇 애국지사에 불과했다. 최고권력자였던 고종이나 민비에 이르기까지 그의 붓끝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잘못을 파고들었다. 그런 그가 오원에 대해서만큼은 적잖은 찬사를 보낸 것이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근대의 신품(神品)이라고 추앙받고 있어 웬만한 유력자(有力者)가 아니면 소장할 수 없다. 나는 금사(錦士) 박항래(朴恒來)에게서 이 그림을 얻어 간신히 소장해 병풍으로 꾸몄다.하지만 나는 그림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공교로움과 묘함을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필치가 대단히 소방(疎放)하고 계산하지 않은 듯 가볍게 점철했는데도 자연스러운 가운데 그윽한 운치가 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신품이라고 하는가 보다.”
매천마저 ‘신품’운운한 것을 보면 오원에 대한 당대 평가가 그다지 과장된 것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만일 그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에 대한 평가나 찬사가 ‘과장’일 것으로 추정하고 넘어가도 오원 예찬론자들은 별 할 말이 없다. 다행히 그의 작품은 여느 작가보다 많이 남아 있다. 현재 확인된 것만 140점 가까이 된다. 그가 죽은 지 겨우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많은 작품이 남아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하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번 마음먹으면 단숨에 그려내는 방식에, 원하는 사람에게 아끼지 않고 그림을 그려 주는 독특한 취향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유작 중에는 ‘신품’이라는 평가에 걸맞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의 이름값 때문인지 미완성 작품은 물론 그리다 만 것까지 가치를 지닌다. 그 중 몇 작품은 말 그대로 ‘신품’이라는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 그 작품들은 위당의 표현처럼 ‘손 가는 대로’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매천의 표현도 위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필치가 소방하고 계산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매화십곡연병풍’(梅花十曲延屛風)을 보자. 작품명 그대로 매화나무를 10폭의 병풍에 연이어 그린 것이다. 90.9cm의 높이에 넓이는 무려 4m30cm에 이르는 초대작이다. 중앙에 서 있는 늙고 거대한 매화가 병풍 끝까지 가지를 뻗어내고 있다. 가지마다 펼쳐진 매화꽃은 매화의 향연을 연출하는 듯 보인다. 초대형 화폭에 단 한번의 붓놀림으로 만들어진 매화의 패기와 담대함은 그가 갖고 있는 신력(神力)을 물씬 풍긴다. 그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필력이 분명하다. 용맹한 독수리 두마리를 그린 ‘호취도’(豪鷲圖) 역시 신품으로 불릴 만하다. 첫눈에도 독수리들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해 준다. 자세히 분석해 보자. 독수리의 생명력은 우선 눈과 부리에서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예(精銳)로운 붓놀림으로, 그야말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모사(模寫)의 대가들이라 해도 그가 부여한 생명력을 똑같이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뒤로 젖히거나 비틀린 모습도 눈여겨 볼 만하다. 독수리의 정면이나 측면을 정적으로 그렸다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생동감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단 한번의 붓놀림으로 그려내린 힘찬 나무 줄기와 서너번 꺾인 가지가 전체 분위기에 긴장감을 더해 준다. 가히 ‘붓의 달인(達人)’이라는 표현이 넘치지 않는다. 그가 단지 굵고 힘차게 뻗는, 그럼으로써 힘과 생동감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작품만 남긴 것은 아니다. 이 점이 그의 천재성을 나타내 주는 또 하나의 근거로 작용한다. 동양화의 전통적 장르인 산수화나 신선도에서는 오원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서 매화병풍이나 ‘호취도’에서 보여주던 긴장과 날카로움은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부드러움과 따뜻함, 넉넉함 등으로 대변되는 동양적 신비주 의가 가득하다.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귀거래도’(歸去來圖), ‘산수도’(山水圖) 등은 전통 동양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표현의 오묘함-. 미술사가들이 오원의 또 하나의 천재성으로 꼽는 요인은 바로 이것으로, 동양회화 수천년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필치는 疎放하고 자연스러운 가운데 그윽한 운치가 있다”
기행괴벽의 종합판 천재 장승업의 행적
천재, 특히 예술가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들은 범인(凡人)과 다른 기벽을 갖게 마련이고, 시공을 초월해 사회는 그들의 기벽에 관용을 베풀어 왔다. 천재들은 엄격한 사회적 규범, 제도, 가치, 책임에 억눌려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청량제이기도 했다. 광기, 자유에 대한 추구, 술과 여자에 대한 탐닉, 권위와 사회적 질서에 대한 무시…. 대체로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천재들이 보여준 기벽의 특징들이다. 서양에서는 모차르트가 그랬고 한국이라면 매월당 김시습과 김수영의 모습이 그랬다. 우리는 오원에게서 이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선율에서 드러나는 자유분방함, 걸핏하면 똥통에 들어갔던 매월당의 기행, 사회적 무책임으로 일관했던 김수영. 오원은 이같은 천재들의 기행괴벽의 종합판이었다.
멋대로 뛰어다녔고 술독에 빠져 살았으며 사회적으로 아무런 책임도 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모두 ‘자유’를 박탈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방종에 가까운 자유분방함이 그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최고의 덕목이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여자가 그리울 때 여자를 품에 안는다. 그림은 그리고 싶을 때만 그린다…. 그래야만 예술적인 혼이 살아났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왔다. 오원은 1843년 생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기록된 1897년은 그의 나이 54세 되던 해였다. 한눈에도 그가 스러져 가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는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릴 무렵 태어나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혁명·청일전쟁·갑오경장 등을 겪었고, 을미사변이 있은 두 해 뒤에 공식적 죽음을 맞았다. 웬만한 민초들도 이겨내기 어려운 시대적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이같은 정치·사회적 격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렵다. 시대적 혼란이 그의 광기(狂氣)를 더욱 부채질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한 천재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그같은 해석이 오원을 제대로 이해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장승업에 얽힌 설화
술꾼 장승업, ‘술과 여자가 있어야 神品 나온다’
오원과 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늘 술을 껴안고 살았기에 그에게는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또 다른 호가 하나 붙어 다닌다. 그러니 오원의 술에 대한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40대쯤을 묘사한 그의 외관을 한번 들어 보자. 술에 찌든 그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 모습이 약간 갸름한 데다 조선 사람에게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노란 동공을 가진 것과 주독(酒毒) 때문인지 코끝이 좀 불그스레하고 우뚝한 코 밑에는 까무잡잡한 수염이 우스꽝스럽게 붙어 있었다.” 우선 그는 누구보다 술 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술만 내주면 누구에게나 그림을 그려줬다. 아예 그림을 그려 돈이 생기면 주막에 맡기고 술을 마셨다. 술값이 다 됐다고 하면 이렇게 얘기했다는 말도 있다. “이봐, 왜 그래, 또 그리면 될 거 아냐.”
이같은 사실을 알기에 그의 그림을 얻고 싶은 사람은 술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술이 최고였다. 고종은 이같은 오원의 성향을 몰랐기 때문에 무조건 술을 끊게 만들어 그토록 원했던 오원의 그림 병풍을 갖지 못했다. 술은 자연스럽게 여자를 부른다. 그 역시 그랬다. 돈만 넉넉하면 기생집을 찾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는 40의 나이를 넘겨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정혼한 아내와 보낸 시간은 단 하루, 첫날밤을 치른 후 곧바로 줄행랑쳤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머무르는 곳을 짐작한다. 술이 있는 기생집이었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사실혼 관계의 여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구전과 자료들이 한 기생을 자주 찾았고 그곳에서 기거했다고 말해 준다. 또 “기생이 옆에 앉아 술을 따라줘야 제대로 그림이 나온다”고 했다는 말도 전한다.
그러나 그의 주벽은 후세 사람을 괴롭힌다. 오원의 진품을 가려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낙관이 다양하다.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낙관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그림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중한 낙관을 이리저리 굴리다 술에 찌들어 잊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낙관이 없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낙관 외에도 그의 진품 여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유가 있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술을 먹겠다며 일어서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요, 술 먹고 그림을 그리다 그대로 잠든 적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림은 당연히 미완성. 이를 그냥 두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그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며 쫓아다니던 제자들이 나머지 부분을 채워 넣은 것이다. 술을 사줬으니 당연히 그림을 내놓아야 한다는 성화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스승 혜산 유숙과의 만남
주인에게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발각당한 것을 14∼15세 경으로 추정한다면 대략 1860년 전후가 된다. 19세기 들어 기승을 부리던 세도정치가 거의 막을 내리며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실권을 잡기 수년전 일이다. 이후 정치는 급박한 외세의 침략과 봉건적 모순으로 극단적인 혼란으로 빠져들었지만, 그의 삶은 오히려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오원의 재능이 양지로 나오자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그림을 청하고 소장을 원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중에는 원석(原石)과도 같은 그의 재능을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혜산(蕙山) 유숙(劉淑)이 그런 인물이었다. 오원보다 10여년 연상이던 그는 이미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화가 중 하나였다. 문인의 기품이 넘치는 산수화의 대가였던 그는 어린 오원에게 회화의 기초를 가르친 유일한 스승이었다. 오원이 혜산을 만나게 된 동기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주인이 소개해 줬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혜산이 유명해진 오원을 찾아 직접 그림을 가르쳐 주겠다고 자청했다는 얘기도 있다. 오원과 혜산이 인척관계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거나 오원이 혜산에게 배웠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자료나 구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오원에게서 혜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천애고아로 머슴을 살아야 했던, 천민에 가까웠던 오원이 본격적으로 스승을 맞게 된 것이다.
오원이 혜산에게서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추정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런 추정의 근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그 이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는 스승 혜산을 넘어섰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오원은 스승에게서도 별반 배울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의 천재성은 그를 넘어섰고 또 자신의 광기를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장소는 따로 있지 않았다. 방에서도 그렸고 마당에서도 그렸고 술집에서도 그렸다. 종이와 붓과 먹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세상 모든 곳이 그의 아틀리에였다.
그뿐 아니었다. 술이 취하면 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림을 그려줬다. 술 한동이 내주면 술집 작부에게도 그림을 줬고 마음이 내키면 그를 찾아와 그림을 청하는 필부(匹夫)에게도 그림을 줬다. 그의 당대 작품이 수천 점에 이를 것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에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을 내줬으니 그 작품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나 그리다 중단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술값 몇푼으로도 작품을 구할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인기 화가였다. 물론 그의 그림을 소장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가 조선 인구만큼이나 많은 그림을 그렸다면 한 사람 앞에 한 장씩 그림을 남겨줬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자기 작품을 가볍게 다뤘다. 천재적 화가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기보다 자신이 마음대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로서 그림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술을 준다면, 여자가 좋다면 그는 무턱대고 그림을 그려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하늘이 준 재능을 민중과 함께 나누고 함께 즐긴, 전설이 남긴 표현처럼 신선인지도 모른다.
기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을 소장하지 못한 한 사람의 불행한 얘기를 남기고 있다. 어떻게든 그의 그림을 갖고 싶어 했고, 실제로 온갖 환대를 다해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던 사람이다.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임금 고종이 그 불운한 ‘장승업팬’이었다. 오원이 한창 때였던 30대 후반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고종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0폭의 병풍을 만들라고 지시하며 벼슬까지 하사했다. 천민 출신의 오원으로서는 가문 대대로 이어질 영예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궁중에서는 예의법도가 최우선이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오원의 천재성이 발휘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고종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술이 필요한 천재. 그래서 고종은 술을 허락하기는 했다. 하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고종은 술이 과하면 일을 망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맥을 잇지 못한 오원의 화풍
神力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원이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자 제자를 자칭하며 그를 따라다니는 화가 지망생들이 많았다. 오원의 화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조석진과 안중식이 대표적인 제자들이었다. 하지만 현대 미술사가들은 그 누구도 오원의 화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그저 흉내내기에 급급했을 뿐 오원의 화풍을 그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오원의 유일한 필력(筆力)이 한몫을 한다. 오원이 즐겨 썼던 화지(畵紙)는 중국산 화선지. 조선산 닥지보다 먹의 미묘한 농담(濃淡)을 잘 살려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아무나 화선지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먹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빨라 붓놀림이 민첩한 화가가 아니면 함부로 붓을 대기도 어려운 종이가 화선지였다. 붓을 대기 무섭게 먹을 빨아들이니 웬만한 화가들은 붓을 대는 순간 그림을 망치기 일쑤였다. 붓을 눌렀다 뗐다를 반복하며 호쾌하게 움직이는 오원만이 화선지의 특성을 살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원이 후대 화풍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비판적 해석도 가능하다. 오원 이후 그를 모방해 빠르게 붓을 놀리는 기법이 유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흉내내기에 그치고 말았다. 오원처럼 빨리 붓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오원처럼 신품을 그려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배울 수도, 함부로 따라 할 수도 없었던 것이 바로 오원의 그림이었다.
끝내 그림 갖지 못한 ‘장승업의 열렬한 팬’ 고종
오원에게 허용된 주량은 하루 2∼3잔. 그것도 일을 하다 도저히 갈증이 생겨 일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감시관이 한잔씩 주는 것이었다. 동아리로 술을 끼고 살던 오원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오원은 줄행랑을 쳤다. 문구를 사러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곧장 술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고종은 그같은 예술가의 기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병졸들을 풀어 당장 잡아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고 주막에서 곤드레만드레 만취한 오원을 잡아 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잡아와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좀 하는가 싶으면 다시 도망가고 만 것이다. 감시관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속이기도 했고, 감시관이 잠든 틈을 타 옷을 갈아 입고 술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너무 화가 난 고종은 결국 오원을 감옥에 가두고 만다.
고종과 오원의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종은 오원의 그림을 너무도 갖고 싶었기에 노심초사,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다시 그를 풀어 일을 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중개자로 나선 것이 이후 을사조약때 망국의 한을 못이겨 자살했던 민영환(閔泳煥)이었다. 오원과 개인적 친분을 쌓으며 나름대로 그의 기질을 익혔던 민영환은 감옥살이를 하는 오원의 처지가 딱해 고종에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그림을 완성시키겠다고 다짐하며 그를 집으로 데려갔다.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고종도 이를 승락했지만, 민영환이라 하여 그를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술을 조금 더 주고 후대하며 그를 집에 머무르게 했지만 오원에게는 궁중이나 민영환의 집이나 감옥이나 전혀 다를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먹고 싶은 술을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마음대로 오가야 직성이 풀리며 그림이 되는 그였기 때문이다. 결국 민영환도 포기했다. 고종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영환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부담을 덜어줬다. 술 한잔에도 그려 주는 그림을 최고권력자였던 고종은 얻지 못했던 셈이다.
이같은 이유에서 오원이 안견·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거장으로 꼽힌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천재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최고봉으로 쳐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료가 별반 없다는 사실에 후세 연구자들은 당혹스럽다. 그가 3대 화가 중 가장 최근 인물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더욱 그렇다. 일화 중심의 단편적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구전돼 내려오는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종합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중복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앞뒤가 맞지 않아 진위를 가리기 힘든 내용도 많다. 앞의 내용들은 그나마 학자들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는 내용들만 담아낸 것들이다. 그가 머슴을 살았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모신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자료는 한약국을 경영하던 이응헌이라는 인물을 거론하지만, 다른 자료는 중인 역관(譯官) 출신으로 한성판윤까지 지냈던 변원규였다고도 말한다.
오원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게 해 준 인물이라면 한국회화사에도 기록될 만한 인물일 것이다. 심지어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가 혜산에게 사사했다는 사실도 부정하는 학자가 있다. 이런 상황이니 그가 몇살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거의 알 길이 없다. 오원이 궁중에 들어가 화원이 된 것은 통상 40대 이후일 것으로 얘기하지만, 민영환과의 관계를 보면 훨씬 나이가 들어서였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학자들은 천민 출신의 미천한 화가에게 당시 역사가들이 기록을 아꼈을 것이고 또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기벽이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生死는 뜬구름과 같다”
상황이 이러니 그의 죽음에 대한 공식 기록도 믿기가 매우 어렵다. 당시에도 이후의 역사가들도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구전은 그 해에 그가 죽지 않은 것으로 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전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지는 그였으니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공식적으로 사망했다는 그해 오원은 훌쩍 서울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해 뒤 다시 그가 돌아왔다는 내용의 구전들이 많다. 더러는 그가 아예 서울을 떠나 한적한 산 속에서 몇해를 더 살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오원은 다시 저잣거리에 나타났다 해서 굳이 자신의 생존을 선언할 위인도 아니었다. 차라리 금강산에라도 들어가 술과 약초를 캐는 삶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구전은 오원이 입에 달고 다녔다는 말도 남겼다. 그의 성격의 단면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사람의 생사는 뜬구름과 같다. 세속에 급급하다 추하게 죽느니 경치 좋은 곳에 들어가 숨어버리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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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검찰, 사헌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