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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王과 妃 걷어치워라
 관리자  07-25 | VIEW : 6,854
KBS 王과 妃 걷어치워라

《●쿠데타로 집권한 수양대군을 왕권수호란 허구의 논리로 미화한, 작가의 오도된 역사관.
●흥미 위주의 시청률 올리려고 정의에 목숨 건 사육신까지 권력욕의 화신으로 난도질.
●전국 중·고교 역사교사들은 「왕과 비」가 비객관적 서술로 학생들의 가치관 혼란을 부추긴다고 분노.》

이덕일 〈역사평론가〉

다음 에 인용하는 글은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서의 일부다.

『정축년(1457, 세조 3년)에 나는 밀양에서 성주로 가면서 중도에 답계역에서 잤다. 그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義帝)의 손자인데 우리 조부께서 항우(項羽)에게 죽임을 당하여 침강에 빠져 잠겨 있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중국 남방의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조선 사람이 아닌가? 땅이 만리나 서로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그가 내 꿈에 나타난 것은 무슨 징조일까… 나는 조선 사람이고 천여 년이나 지난 뒤에 태어났지만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는가?… 혼령이 지금까지 정처없이 헤매고 있구나. 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큼 굳으니 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조문한다. 「혼령이여, 오셔서 흠향(歆饗)하기를 바라나이다」』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유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이란 뜻인데 의제는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회왕이다. 「조의제문」은 세조 3년에 쓰였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쓰인 지 41년이 지난 연산군 4년(1498) 무오년의 일이었다. 바로 무오사화의 단초가 이 글로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작자 김종직은 이미 6년 전인 성종 23년(1492)에 사망한 터였다. 이 글이 뒤늦게 문제가 된 배경을 알려면 연산군 때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란 정치 기상도를 읽어야 한다.
연산군 때의 집권세력은 훈구파였다. 이들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하나의 특권층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모든 정치·경제적 특권을 장악한 세력이었다. 세조 시대에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공신들이 훈구파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단종 원년(1453)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편에 섰던 한명회 등 43명의 정난(靖難)공신이 책봉된 데 이어, 세조 원년(1455)에는 단종을 쫓아내고 세조를 즉위시킨 권람, 신숙주, 한명회 등 46명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봉된다. 이어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 난을 계기로 45명의 적개(敵愾)공신이 책봉되고, 예종 즉위년(1468)에는 예종을 즉위시킨 공로로 39명의 익대(翊戴)공신이 책봉되며, 성종 2년(1471)에는 성종을 즉위시킨 공로로 75명의 좌리(佐理)공신이 책봉된다. 여기에도 한명회와 신숙주는 빠지지 않는다. 불과 20년이 채 못 되는 기간에 무려 248명의 공신이 책봉된 것이다.
공신으로 책봉되면 막대한 토지와 노비가 포상으로 수여됐다. 이런 경로를 거쳐 이들 공신집단이 훈구파란 특권층을 형성하여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계유정난 이후 100여년간의 조선역사는 실로 이들 부패한 훈구파에 대한 사림파의 저항의 역사였다.
성종 때부터 관직에 본격 진출한 사림파는 주로 언론기관인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三司)에 자리잡은 후 훈구파에 대한 공세를 취한다. 사림파가 훈구파를 비판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부정하고 부패한 특권층이라는 것이었다. 이들 사림파 언관(言官)들은 대개 김종직의 제자들인데, 훈구파에 대한 이들의 공세는 젊은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림파의 비판에 곤혹스러워하던 훈구파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는 불온문서였기 때문이다.

조의제문, 세조 부정하는 불온문서

김종직의 제자들은 「조의제문」에서 말하는 의제가 단종이고 항우가 세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일손과 함께 사관으로 있던 김종직의 제자 권오복(權五福)과 권경유(權景裕)도 물론 「조의제문」에 담긴 이런 은유법을 충분히 알고 이를 사초에 실은 것이다. 즉 세조의 집권 자체를 직접 부정하지 못하더라도, 세조의 집권이 부당하다는 자신들의 역사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한 것이다.
김종직의 꿈에 정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제를 거론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필자는 그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거론한 인물은 초나라 의제가 아니라 조선의 단종이라고 해석한다. 그가 꿈을 꾼 시기인 세조 3년은 바로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해였다.
그 한 해 전에는 유명한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조정이 젊은 선비들의 피로 물들었고, 세조 3년에는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벌써 수양의 친동생 두 명이 사형당한 것이니 지하에서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그리고 문종의 통곡이 들리는 듯한 상황에 세조는 단종을 죽일 결심을 한다.
금성대군 사건이 일어나자 더 이상 단종을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한 세조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간 단종을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했다가 재위 3년 10월에 양녕대군의 세 번에 걸친 주청에 따라 단종을 죽이고 만다. 단종이 비참한 죽임을 당한 바로 그 해에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썼다는 것은 그가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흠향(歆饗)하기를 바란 혼령이 단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들인 사관들은 「조의제문」 외에도 세조의 즉위를 비난하는 김종직의 또 다른 글을 사초에 실었는데, 동진(東晋)의 무장이었던 유유(劉裕)가 공제(恭帝)에게 선양 형식을 빌려 그를 폐위시키고 송(宋)나라를 연 사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사초였다. 이 역시 선양 형식을 빌려 단종을 쫓아낸 세조를 비판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이 사실을 발견한 유자광 이극돈 윤필상 등 훈구파들은 쾌재를 불렀고 연산군에게 『이는 세조의 즉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고해 바쳤다. 즉 체제를 부정하는 반체제 세력이라는 고변이었다.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은 흥분해서 사관들을 국문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사초를 실은 김일손은 뇌졸중, 즉 중풍으로 고향인 경상도 함양(咸陽)에 누워 있었으나 의금부 관리들에게 체포돼 서울로 끌려왔다. 김일손은 국문을 당한 후 다른 사관인 권오복 권경유와 함께 대역죄로 몰려 온몸이 수레로 찢기는 능지처사를 당했고,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은 땅에서 파내져 역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다. 대역죄로 몰렸으니 그 가족도 모두 화를 입어 온 집안이 도륙되었다. 이 외에도 사림파 사관인 홍한은 사초에 『정창손은 스스로 신하로서 섬겼던 노산군을 앞장서 죽이자고 주청했다』고 기록해 죄를 얻었다. 이 역시 세조 때 공신들의 무도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들 외에도 이목(李穆) 정여창(鄭汝昌)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가 젊은 선비집단인 사림파가 쑥대밭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인데 사화(士禍) 대신 사화(史禍)라고도 하는 이유는 사관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다시 난도질당하는 사림파 선비

중요한 점은 무오사화가 본질적으로 41년 전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과 같은 내용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41년 전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이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는 역사관을 가졌던 젊은 선비들의 목숨을 건 항거였던 것처럼, 41년 후의 무오사화 역시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는 젊은 선비들이 진실을 후세에 전하려다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사육신 사건이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무오사화는 춘추관 사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밖에 없었다.
이들은 신분상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을 경우 지배층으로서 신분을 보장받으며 정승·판서까지 올라 영화롭게 살 수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의(義)」를 실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바로 이들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에 목숨거는 진정한 선비정신의 정화(精華)로, 가치관의 혼돈 시대에 사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사육신 사건과 무오사화가 발생한 지 무려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 KBS는 이런 선비정신을 계승하여 혼탁한 시대에 맑은 샘물을 공급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정의」에 대해 일주일에 100분씩, 재방송까지 포함하면 무려 200분씩 공개적으로 침을 뱉고 있다. 바로 KBS의 역사드라마 「왕과 비」가 이런 비뚤어진 역사의식을 무차별 전파하면서 선조들의 치열했던 삶에 침을 뱉는 주역이다. 마치 「역사의 신」으로부터 역사 해석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인정받은 듯한 두세 명의 제작진과 작가에 의해, 그리고 이들의 왜곡된 역사해석을 방관하는 경영진에 의해,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진실은 다시 한 번 매도되고 있다. 사림파 선비들의 시신 또한 화면으로 다시 끌려나와 난도질당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8월 바로 「신동아」 지면을 빌려 당시 방영되고 있던 MBC 「대왕의 길」과 KBS의 「왕과 비」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약하면 역사물 서술자는 그 장르를 불문하고 사관(史觀)과 사료해석 능력을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대왕의 길」은 사료해석 능력에 문제가 있고, 「왕과 비」는 사관에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는 지적이었다.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는 면죄부?

그후 「신동아」에 실린 내용이 네티즌들에 의해 PC통신 등에 계속 올라오고, 11월경 뒤늦게 일부 일간지에서 보도하면서 물의가 일자 KBS의 옴부즈만 프로인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에서 필자더러 이 프로에 출연해 작가와 토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KBS측에 면죄부만 주는 것이 아니냐」는 다른 역사 연구자들의 의견도 있었으나 필자는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로서 굳이 토론을 기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출연을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11월13일 오전 KBS에서 녹화를 했고, 그 내용이 11월15일 아침 7시 30분부터 20분 정도 방송되었다. 불과 20분짜리 녹화에 무려 2시간 이상이 걸린 이유는 NG가 남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왕과 비」의 작가와 그만큼 뜨거운 설전이 오갔기 때문이다. 2시간 이상의 녹화분량이 KBS의 구미에 맞게 20분 짜리로 적당히 편집되지 않겠느냐는 다른 연구자들의 우려가 있었으나 나는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 제작진의 양식을 믿고 편집과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11월15일 방영된 내용이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한 수준 이하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KBS의 후속조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KBS가 보여주는 자세는 「왕과 비」뿐만 아니라 KBS가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란 프로를 왜 만드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연구자의 우려처럼 현재 방영이 계속되는 「왕과 비」의 내용은 KBS가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를 자신들의 오류에 대한 반성의 재료로 삼기보다는 면죄부로 삼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적한 내용은 단 하나도 반영되지 않고 일방적인 시각, 즉 김일손과 권오복·권경유의 목숨을 건 사관(史官)정신에 침을 뱉는 뒤틀린 사관이 일주일에 200분씩 여전히 방영되고 있는 것이다.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에서 2시간 내내 벌인 설전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었다. 「왕과 비」의 작가는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옳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르다는 것이었다. 이는 서로의 생각 차이이기 때문에 쉽게 좁혀질 「거리」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개인의 생각은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타당하고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왕과 비」의 작가가 제시하는 근거들은 타당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은 자의(自意)투성이의 일방적인 논리일 뿐이었다.
작가는 계유정난을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 규정하면서 이 쿠데타의 성공은 왕권의 승리라고 강변했다. 당시 왕은 단종이지 수양대군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에서 왕권은 오직 한 사람, 국왕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왕의 위임을 받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데 이를 수렴청정이라 한다.

드라마 작가의 이상한 논리

조선시대에는 국왕을 군부(君父)라고 불렀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부(父)자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국왕으로 즉위한 이상 만백성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군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단 임금으로 즉위한 이상 사적 혈연으로 백부든 삼촌이든 모두 신하이며 아들이라는 게 왕조국가의 정치체제다. 큰할아버지 양녕대군도 숙부 수양대군도 모두 단종의 신하로서 충성을 바쳐야 하는 존재이지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국왕이 아니다.
작가는 수양대군이 왕권의 수호자일 수 있는 자격을 숙부이자 종친이라는 그의 특수한 지위로 합리화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자가당착적인 모순인가는 같은 지위에 있는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은 미성년인 국왕이 즉위하면 대궐의 가장 웃어른인 대비가 정청 안에 발을 드리우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종은 세종비인 대왕대비 소헌왕후 심씨는 물론 문종비인 왕대비 현덕왕후 권씨도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수렴청정할 어른이 없었다. 재위 2년 만에 병이 위독해진 문종이 죽기 전 이런 공백을 메울 장치로 고안한 것이 고명(顧命), 즉 유명(遺命)이었다. 문종은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을 불러 어린 단종을 부탁했는데, 왕조국가에서 선왕의 유명은 공화국에서 국민의 뜻과 같이 헌법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문종이 고명을 내린 대상이 수양대군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종이 동생인 수양대군을 배제한 이유는 명백하다. 종친인 그가 고명을 받을 경우 왕위를 노릴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를 배제한 것이다. 수양대군측에서는 훗날 문종이 위독할 때 자신을 불렀는데 환관이 후궁 숙의(淑儀)를 부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부르지 않았다는 궁색한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위독하면 조정 전체가 긴장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문종이 누구에게 고명하느냐에 따라 정국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는 매우 민감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수양」과 「숙의」를 착각했다는 수양측의 변명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명분이 없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일 뿐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종친인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는 것이 신권에 맞서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는 작가의 논리는 수양을 숙의로 착각했다는 수양측의 변명보다 더 저차원적이다. 단종 초년에 인사권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한 인물은 황보인·김종서 같은 정승들이 아니라 수양대군과 같은 종친인 안평대군이었다.
황표정사란 정승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국왕에게 올리면 그 위에 점을 더해 추인하는 제도였는데, 단종 초년에 황표정사의 권한을 갖고 있던 정승들은 신하들인 자신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 권한을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에게 넘겼던 것이다. 이는 황보인·김종서 등이 역모를 꾸몄다는 수양측 논리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말해주는 증거의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제도는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제도였다. 의정부 정승들이 수양대군이 아닌 안평대군에게 황표정사를 맡긴 이유는 적어도 안평은 왕위에 대한 욕심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양은 왕권, 안평은 신권인가?

안평대군이 황표정사의 권한을 가진 것은 작가의 논리와는 반대로 단종 초년에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 의정부 정승들이 아니라 종친 안평대군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종친과 왕권을 동일시하는 것이 작가의 왕권에 대한 시각이라면 단종 초년의 정국은 종친 안평대군이 장악했으므로 왕권이 강화된 시기였다. 왕권 강화를 위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는 작가의 논리는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의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작가는 안평대군에게 「악마」의 딱지를 붙여 그를 매도하고 나선다. 『단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안평대군이 종친뿐만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사람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해 끝내 종실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다는 시각으로 이를 바라본 것이다.
수양측에서 작성한 이 기록 자체가 「왕과 비」의 작가 정하연 씨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허구적인 논리로 당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안평대군이 장악한 조정은 어떤 논리로 신권의 나라가 되고, 수양대군이 장악한 나라는 어떤 논리로 왕권의 나라가 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만약 「왕과 비」가 KBS라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특정한 출판사에서 개인적인 저서로 출판되었다면 필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시청료로 유지되는 공영방송에서 방영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고차원 저차원의 문제를 떠나 옳으냐, 그르냐의 당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을 합리화하는 작가의 논리는 급기야 수양대군은 왕이 되지 않고자 했는데 주위에서 계속 즉위할 것을 강권하고, 나아가 단종도 스스로 양위를 권고한다는 데까지 나간다. 한마디로 수양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주위에서 떠밀어 왕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수양이 왕이 되고 싶지 않았으면 계유정난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될 것이고, 즉위하지 않았으면 될 것이다.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이 아무런 혐의도 없는 대신들을 합법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병을 몰고 가서 때려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마저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단종을 무시하는 신권론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궁색한 쿠데타 옹호

작가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권의 나라」라는 논리를 펼쳤고, 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신하들이 보유한 토지인 과전(科田)이었다. 신하들이 막대한 과전을 지닌 특권층이 돼 조선의 경제를 망쳤다는 논리다. 이는 작가가 조선 초기의 정치·경제구조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일 뿐이다.
과전은 요즘 말로 하면 공무원에게 주는 봉급이었다. 봉급 대신 토지를 지급한 것인데 해당 토지의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거둘 권리인 수조권(受租權)을 준 것이다. 중요한 점은 과전은 해당자가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토지라는 점이다. 즉 세습이 불가능한 한시적인 토지였던 것이다.
반면 앞서 말했듯이 공신들에게 나누어준 공신전(功臣田)은 세습이 가능한 토지였다. 바로 이 공신전을 독차지한 세력이 세조 때부터 형성된 훈구파였다.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 사건 관련자들은 사형당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모든 재산까지 몰수됐는데, 이들의 토지를 나누어 가진 인물들이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 세조측 인물들이었다. 바로 이렇게 나누어준 토지가 공신전인 것이다. 실로 막대한 양의 공신전 때문에 건전한 부의 분배는 무너지고 벼슬아치와 일반백성 간 그리고 사대부 사이에도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공신전을 정상적인 봉급인 과전과 혼동하는 등의 잘못된 인식에서 무리한 논리를 합리화시키려다 보니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모두 매도된다. 안평대군을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해 그를 죽인 것을 정당화하더니, 이번에는 수양의 또 다른 동생 금성대군을 죽이기 위해 그 또한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금성대군은 친형 수양대군에게 쫓겨난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수양에게 사형당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세종과 장형 문종의 후사는 단종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비록 세불리하지만 사육신처럼 단종 복위에 목숨을 걸었다가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 금성대군이 단지 수양에 반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작가의 논리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마치 수양의 정적인 것처럼 묘사하는 데까지 나간다. 송씨는 정6품의 중급 벼슬아치였던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그녀를 왕비로 책봉한 사람은 바로 수양대군이다. 그런 그녀를 수양의 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작가의 발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가례 당시 단종이 16세였으니 기껏해봐야 열일곱 정도였을 단종비 송씨는 「왕과 비」에서는 책봉되자마자 노련한 정치가로 변해 수양을 압박한다. 이 당시 사실상의 국왕이 단종이 아니라 수양대군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도, 대호(大虎) 김종서를 때려죽이고 정권을 잡은 수양에게 중급 벼슬아치의 딸이 도전하고, 이로 인해 수양대군이 궁지에 몰린다는 설정은 1979년의 12·12와 80년의 5·17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국보위원장에게 당시 허수아비였던 최규하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가 도전하고, 이로 인해 전씨가 궁지에 몰린다는 상황보다 더 실현성이 없는 설정이다.

일선 역사교사들의 견해

필자는 「왕과 비」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라고 생각해, 전국 중·고교 역사교사들의 모임인 「전국역사교사모임」(회장:박병석, 전남 고흥고)의 도움을 얻어 일선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강원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현직 역사교사 78명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역사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견해는 이 드라마에 대한 중립적 평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설문조사 결과 시청률이 높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과 비」를 꼭 시청한다는 교사는 한 명에 불과했으며, 가급적 시청하려고 노력한다는 교사는 10명인 반면 시청하지 않는다는 교사는 무려 59명이었다. 이 숫자에는 「왕과 비」의 시각에 대한 소극적 거부감이 포함돼 있는 것인데, 일부러 시청하지 않는다는 적극적 거부감을 표현한 교사도 4명이나 있어, 이 드라마에 대한 세간의 반발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전반적인 시청률 하락이 다행이라는 말은 그만큼 중·고교학생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덜 끼치기 때문에 성립하는 역설의 변증법이다. 실제로 「용의 눈물」이 방영될 때는 드라마에 대한 학생들의 질문이 잇따랐는데, 「왕과 비」는 시청하는 학생이 적어서인지 그리 많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답이 많았다. 「왕과 비」의 내용 때문에 교육현장에서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54명의 교사가 없다고 대답한 반면, 있다고 대답한 교사는 10명으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역시 낮은 시청률 덕으로 생각된다. 「왕과 비」 때문에 느낀 교육현장의 문제점은 학생들이 드라마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는 데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 문제가 가장 많았다.

역사물은 보통 드라마와 다르다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에서 작가는 드라마 서술은 시종일관 창작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반면 나는 역사드라마는 허구적 사실을 그린 다른 드라마나 소설과 달리 실재했던 사건, 실존했던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그 해석은 그 사건의 실제 성격과 인물들의 실제 행적, 사료 등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한 교사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창작의 자유에 속하므로 문제없다고 대답한 교사는 6명이었던 반면, 역사 해석은 사관·사료 등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교사는 58명이었다.
이 설문에 답한 교사들은 대부분 20∼30대의 젊은 교사들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학문·사상의 자유에 대한 갈구를 가지고 80∼90년대 대학시절을 보냈던 이들 교사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물에 있어서 창작의 한계, 즉 역사해석은 엄정한 근거에 따라야 한다는 신중한 견해이기 때문이다.
「왕과 비」를 끌고 나가는 작가의 기본재료인 계유정난에 대한 교사들의 견해도 물어보았다. 계유정난을 정당한 행위로 인정하는 교사는 4명이었고, 잘 모르겠다는 대답은 6명이었다. 그 외에 권력투쟁이라고 대답한 교사도 있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이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대답은 무려 58명이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이 교사들이 작가만큼 당시 상황을 몰라서 계유정난을 쿠데타로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교사들은 작가가 세조의 입장에서 「왕과 비」를 그리는 이유를 흥미를 끌어 시청률을 올리려는 방편으로 보고 있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까지 있었다.
이들이 「왕과 비」에 토해놓는 불만으로는 수양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것이 가장 많았고, 흥미 위주의 비객관적 서술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역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자리에서 볼 때 시청자들이 드라마 내용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다. 그 대안으로 스스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위원제를 제시하는 교사들도 있었다.
이런 우려는 사실상 매달 꼬박꼬박 시청료를 납부하는 교사들이 할 일이 아니라 이들이 내는 시청료로 드라마를 제작하고 봉급을 받는 KBS 경영진이나 제작자들이 해야 할 걱정인 것이다. 누구보다 역사를 사랑하며, 그래서 역사드라마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이들 역사 교사들로부터 후원은커녕 이런 걱정과 꾸중을 들어야 하는지 KBS 경영진이나 제작자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왕과 비」에 거듭 문제제기하는 이유

「왕과 비」의 작가는 정사(正史)인 『단종실록』에 근거해 「왕과 비」를 쓴다면서 정사에 근거를 두는 이상 문제가 없지 않으냐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선시대 역사서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에 정사와 야사(野史)를 구분 짓는 잣대는 지금과 달리, 관(官)에서 편찬했느냐 아니면 개인이 편찬했느냐 하는 것이다. 관에서 편찬한 역사서는 모두 정사가 되고, 비록 사관(史官)이 편찬했어도 개인적으로 편찬했으면 야사가 되는 것이 조선시대 정사와 야사의 구분이다.
주지하다시피 『단종실록』은 세조측에서 편찬한 것이다. 『단종실록』은 즉위하기 전의 수양대군을 기록할 때 「세조께서」라고 표현하는 이상한 서술법의 정사다. 『단종실록』의 왕은 단종인데 일개 신하에 불과한 수양을 표현할 때 「세조께서」라고 표현하는 가치전도적인 기록이 작가가 정사로 굳게 믿는 『단종실록』이다. 따라서 이런 사료를 참고할 때는 엄밀한 사료 검증이 필요하다.
만약 세조가 옳았다면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림파 사관들이 목숨을 걸고 이를 사초에 싣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는 것이 진실을 후대에 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이 확신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레에 사지가 찢기면서도 지하에서 만나볼 단종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 국왕에 대한 충성은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국왕으로 상징되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즉 단종에 대한 충성은 단종이란 어린 소년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단종으로 상징되고 대표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왜 거듭 「왕과 비」에 문제를 제기하는가. 토크빌이 말했듯이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드라마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한 세기가 지나면 전두환 일파의 입장에서 80년대사를 다루는 작품이 공영방송을 통해 당당히 방영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전두환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5공 초기에 출판된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기본 사료로 드라마를 서술한다면 전두환씨는 일부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선동으로 혼란에 빠진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되는 반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모든 민주인사·학생들은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될 것이다. 이 어찌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 역사 교사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끝을 맺자.

『그러지 않아도 청소년들의 가치관이 혼란한 이 시대에 공영방송에서 왜 이런 가치전도적인 역사 드라마를 방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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