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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이발관’과 ‘수양제 스낵’ - 運河都市 揚州 紀行 -
 관리자  07-25 | VIEW : 2,848
‘수양제 이발관’과 ‘수양제 스낵’ - 運河都市 揚州 紀行 -

朴漢濟

운하도시 揚州와 망국황제 隋 煬帝의 墓를 찾아서

朴漢濟 : 46년 경남 진주(진양) 출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96~97년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저서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일조각, 1988). “인생-나의 五十自述” (한길사, 1997).

長江과 大運河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四通八達의 교통중심지로서 오랫동안 번성했던 揚州는 인구 28만명의 한적한 도시로, 이제 중국 육상교통의 대종을 이루는 기찻길마저 비켜가고 있었다. 새로운 길이 생기면 낡은 길은 빛을 잃게 마련이다. 1920년 北京∼上海 간의 京弓線이 개통되면서 운하의 효용성은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崔致遠과 日本僧 圓仁이,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찾았던 때와는 달리 양주는 그렇게 초라했다.
양주를 찾은 것은 亡國을 자초한 황제 隋 煬帝의 墓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황제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면 일개 村老보다 나을 것이 없는 법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를 받아 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나는 양주 北郊 雷塘의 논 가운데 잡목에 둘러쌓인 채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진 묘 한 기가 실제 양제의 묘라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빛과 그림자를 확인하고자 했을 뿐이다. 다시 태어나도 황제이기를 원할지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양제를 옛 황제로 대접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곳 양주에서 한 도시의 영광과 쇠락의 자취를 보았고, 한 권력자의 영욕의 흔적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서글픔이 기쁨보다 우리에게 더 진한 감동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승자보다 패자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 나서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현세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영광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어느 인생인들 드라마틱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특히 조상의 음덕이나 경제적 배경이 별로 없이 自手成家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 극적이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끼니마저 거르는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자라 권력의 정상 혹은 그 언저리에서 끝내 천길 구렁텅이로 추락한 사람들의 ‘野望과 挫折’의 스토리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수 양제도 그런 인간에 다름아니었다. 그래서 필자의 가슴은 이렇게 아픈 것이다. 최근 두 법조인의 영광과 좌절의 인생역정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처럼….
양제의 묘를 지키는 것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발관과 스낵 가게뿐이었고, 양주 동쪽 고운하에는 거대한 龍船에서 흘러나오던 奏樂 대신 삶의 대부분을 작은 배 한 척에 기대고 사는 民草들의 한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지명은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나 필자의 의도에 따라
우리 음으로 표기했습니다.<편집자>

필자는 지금까지 강소(江蘇)성 양주(揚州)를 두 번 찾았다. 첫번째는 1997년 1월 중순이었고 두번째는 98년 9월 초였다. 첫번째 방문은 소흥(紹興)과 무석(無錫)지역을 답사하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항주에서 저녁 6시 반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무석에서 내리니 다음날 오전 8시였다. 그 옛날 수(隋)나라 양제가 만든 운하(運河) ‘강남하’(江南河)를 밤새 타고 온 것이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밤에 이동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나름의 이점이 있다.
연도에 펼쳐지는 경치를 살펴 볼 기회가 줄어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교통비만 내면 여관비는 절약된다. 어둠 속에 배를 타고 운하를 달리는 것은 기차를 타는 것과는 다른 정감을 느낄 수 있다. 항주에서 시작된 운하길은 무석에서 끝나지만 수·당(隋唐)시대에는 내가 탄 배로 장강(長江) 남안(南岸)의 진강(鎭江)을 거쳐 곧장 양주로 직행할 수 있었다.
양주에 간 목적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수·당시대 최대의 항구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양주는 잘 알다시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운하와 장강(長江)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당대 이후 명·청(明淸)시대까지 번성했던 도시였다. 최근 전통시대 중국의 도시구조에 관심을 갖고 보니 당대의 상업도시로 유명한 양주에서 당시 신흥 지방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수 양제의 묘를 찾는 일이었다. 나는 수·당시대 황제들이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고구려 침략에 매달렸던가 하는 의문을 갖고 논문 한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양제의 독특한 인간성과 기이한 행적에 흥미를 갖게 된 데다 직접 망국을 당한 황제의 무덤이 지금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지난번 서안(西安)을 방문했을 때 그 성패 자체만을 따지지 않는다면 행적면에서 그와 매우 유사했던 당 태종의 무덤 소릉(昭陵)의 웅장함에 놀란 것도 양주를 방문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양주로 가는 길에 수 양제가 판 운하길의 일부를 이용한 것은 필자 나름으로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 양주에는 갔으나 수 양제의 묘를 보지 못했다. 그것이 그후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무석에서 열차로 남경(南京)으로 이동한 후 남경 어디에 숙소를 정해놓고 하루치기로 양주에 가서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려는 당초의 계획이 무리이기는 했지만, 그 때 수 양제의 묘를 찾아 보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북경을 떠날 때, 나의 여정 중에 양주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중국인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양주 답사는 가급적이면 하루만에 끝내라고 충고하는 것이었다. 부득이하여 양주에서 숙박하는 경우에는 큰 호텔에 숙소를 잡되 밤에는 절대로 나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땅거미가 지면 양주 본지인들도 외출을 삼갈 정도로 치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밤에는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담이 약하기로는 남에게 빠지지 않는 내가 그런 말을 듣고 하루밤을 잘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남경대학 외국학생 숙사인 서원(西苑)에 방을 정해 두고, 하루치기로 양주 답사를 끝낼 심산으로 남경으로 떠났던 것이다.
양주가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춘추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이곳에 고운하인 한구(距溝)를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양주는 장강에 연해 있고 바다에 가까이 있어(瀕江近海)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요지라는 지리적인 조건과 물자 생산이 풍부하여 ‘쌀로 밥을 짓고 고기로 국을 끓이는’(飯稻羹魚) 소위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는 경제적 조건 때문에 일찍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많이 된 지역이었다.
양주가 우리에게 깊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전한(前漢) 초 중앙정부에 반대해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주도했던 오왕 유비(劉捕)의 수도(당시는 廣陵)가 바로 이곳이었던 때문이다.
양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는 수 양제가 장강(長江)∼회하(淮河)∼황하(黃河)∼대해(大海)를 연결하는, 즉 중국 대륙 남북을 관통하는 운하를 세우면서부터였다. 특히 당나라 현종 시기에 일어난 ‘안사(安史)의 난’ 이후 북방이 난리에 휩싸이게 된 데다, 당시 중국 경제의 중심(重心)이 점차 남방으로 이동하는 추세 속에서 양주는 문득 전국 최고의 경제중심 도시가 되었다.
또 인구 47만명 가운데 아랍 상인이 5,000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당시에는 세계 굴지의 국제무역항이기도 했다. 당대 후기 100여년간 중앙정권은 양주에서 받아들인 세금에 의존해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6명의 재상이 양주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를 역임했거나 재상에서 물러난 후 그곳 절도사로 부임했다.
당시 양주의 경제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은 ‘양주의 부가 천하의 제일이어서 당시 사람들은 <양일익이>라 칭한다’(揚州富庶甲天下 時人稱‘揚一益二’)는 문구에 잘 표현돼 있다. 즉, 양주는 익주(四川 成都)와 더불어 당시 최대의 경제도시로서 이름을 날린 것이다. 이런 양주의 경제적 지위는 그후 명·청시대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남북 조운(漕運)과 염운(鹽運)의 중심 거점으로 중국 2대 상인그룹인 산서상인(山西商人:山陝商)과 휘주상인(徽州商人:新安商人)이 이 지역 유통권 장악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양주를 찾은 것은 그토록 위대했던 양주의 영광의 자취를 찾아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한 때 지상 최고의 영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아마도 매우 초라하고 못난 흔적만 남기고 있을 수 양제의 모습을 찾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오전 10시쯤 남경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에 올랐다. 고속도로가 그런 대로 잘 뚫려 있어 약 2시간만에 양주 서부터미널(西站)에 닿을 수 있었다. 아무리 외국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배낭을 메고 내리는 나는 택시기사들에게는 좋은 먹잇거리였던 것이 분명했다.
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두 운전기사가 각각 내 손을 하나씩 나누어 잡고는 마구 끌어당기더니, 순식간에 주먹질이 오가고 결국 두 사람은 땅바닥에 뒹굴기까지 한다. 내가 주역이 된 예상치 않은 사태의 전개에 겁에 질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마침 막 떠나려는 마이크로버스([小公共汽車)가 보였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올라타버렸다. 그 아수라장을 우선 빠져나가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친구의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 없었다.
공포의 땅 양주는 이런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차 안에서 택시 운전수가 뒤따라오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감에 새가슴을 조이며 뒤돌아보기를 몇번이나 했다. 그 버스는 마침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라, 제일 번화가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내렸다. 하차 후 몇 사람에게 물었으나 양제의 묘의 위치를 시원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먼저 당대 양주성의 중심인 당성(唐城) 유지(遺址)를 찾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복무원(직원)이 소상하게 약도를 그려 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성 유적지 바로 옆에 유명한 대명사(大明寺)가 있다. 이 절은 최치원(崔致遠)이 한때 머무르기도 했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저자 일본승 원인(圓仁)과 이곳 양주 태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율종(律宗)을 연 감진(鑑眞)화상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 절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당성(唐城)유지는 이전의 양주부(揚州府)가 소재하는 소위 ‘아성’(衙城)의 일부분이다. 당성 위에 올라서니 양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을 ‘촉강’(蜀崗)이라 부르지만, 양주 시내보다 대체로 해발 100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한 것 같았다. 당성 앞에는 이전의 해자였던 곳인 듯 아직도 긴 호수가 가로질러 남아있다. 당성 일대를 구경하고 나니 땅거미가 졌다.
당성 복무원에게 수 양제의 묘의 위치를 대강 안내받았지만 그곳은 양주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교외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경에서 출발한 시간이 늦은 데다 게눈 감추듯 지나가는 것이 겨울 낮이다. 북경의 친구가 한 말과 터미널에서 일어난 일이 자꾸 상기된다. 낮이 이럴진대 밤이야 오죽하겠는가?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수 양제 묘를 포기하고 곧바로 장강을 건너 한때 삼국(三國) 오(吳)나라 수도의 하나였던 진강을 거쳐 남경으로 돌아와 버렸다.
해는 바뀌어 98년 9월 초, 남경에서 열리는 중국위진남북조사연구회(中國魏晋南北朝史硏究會) 국제 학술토론회에 참석차 떠날 때에는, 이번에는 수 양제의 묘를 꼭 찾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9월 11일 같이 학회에 참석했던 동료 교수 3명, 남경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J씨 등과 함께 마이크로 버스를 전세내어 다시 수 양제의 묘를 찾아 나선 것이다. 사전에 남경박물관 관계자의 전화 소개가 있었기 때문에 양주박물관에 도착하니 관장 이하 여러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들은 박물관을 구경시키고 나서 고급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주문하는 고급 요리들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J교수에게 “우리더러 저 식사값을 모두 부담하라고 하면 어쩌지”라고 얘기하면서 그를 보니 그의 얼굴도 역시 심각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극진하게 대접했고, 또 수 양제의 묘까지 동행하면서 안내해 주었다. 유맹(流氓 : 깡패)만이 아니라 이런 문화인도 양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양제는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양광(楊廣)이다. 그는 젊은 날 여자문제가 깨끗해 황태자가 되었고, 황제가 되어서는 여자와 노는 데 정신을 팔다 그만 나라도 빼앗기고 목숨도 잃었던 황제였다. 그러고 보니 대장부의 일을 일으키는 것도 여자이고, 망치는 것도 여자인 모양이다.
그가 황태자였던 형을 밀어내고 대신 황태자가 되었던 것은 어머니 독고황후(獨孤皇后)의 덕택이었다. 남다른 질투심 때문인지, 윤리적 결벽성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독고황후는 신하들마저 정처(正妻) 외에 다른 여자를 곁에 두는 꼴을 그냥 두지 않았다. 우문씨(宇文氏)의 나라를 빼앗고 다시 천하를 통일한 천하대장부였던 남편 수 문제 양견마저 그녀를 두려워한 나머지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못했다.
황태자였던 형 양용(楊勇)이 정처 원씨(元氏)가 있는 데도 운씨(雲氏)를 총애한 것이 그녀를 노하게 하였고 결국 그 때문에 그는 폐태자되었다. 형 대신 양광이 황태자가 된 것이 개황(開皇) 20년(600)의 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 혈기왕성한 나이까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그를 두고 황태자 자리를 겨냥하고 계략을 꾸민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천하 절색 몇십명쯤은 쉽게 주위에 둘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그에게는 그것이 설사 계략이라 하더라도 인내력 하나만은 상을 줄 만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 그를 이중인격자로 평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독고황후가 죽었을 때, 황태자였던 그는 통곡하다 졸도까지 하는 연기를 펼치기도 했지만,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평소처럼 담소도 즐겼다는 것이다.
그를 매도하는 학자들이 자주 드는 그의 행위는 아버지와 한 여자를 두고 벌인 삼각관계다. 어머니 덕에 황태자가 되었지만, 30이 넘을 때까지 황태자로 머물러야 했던 그는 무료하고 의미없는 세월의 흐름에 약간 안달이 났을 것임이 분명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아비 문제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양광은 문제가 죽은 뒤의 계획을 적은 밀서를 권신 양소(楊素)에게 보냈다.
궁인의 실수로 그 문건을 손에 넣은 병석의 문제는 격노했다. ‘언론문건’ ‘사직동보고서’ 등이 그랬듯이 절대 공개되지 않는 비밀문건이란 자고로 있을 수 없는가 보다. 여기에다 병석의 문제를 간호하던 아비의 애첩인 선화부인(宣華夫人)에게 욕망을 채우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약속이나 한 듯 한참에 터지게 마련이다. 이 두 사건으로 격노한 문제는 양광을 폐태자하고 이미 폐태자된 양용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던가? 양광은 양소와 모의하여 문제를 시해하고 그 형마저 죽였다는 것이 대강의 스토리이다. 한마디로 살부살형(殺父殺兄)의 패륜아라는 것이다.
그의 축생(畜生)과 같은 행위에 대한 기술은 아버지를 죽인 바로 그날 밤, 아비의 애첩인 선화부인을 범했다(烝)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일종의 쌍패륜이다.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황제를 향한 그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그처럼 오랫동안 참았던 정욕을 통제하지 못한 패륜도 문제지만, 너무 잘난 선화부인에게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날 밤의 일에 대한 기록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어머니뻘인 선화부인을 자기 여자로 삼은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관점을 달리하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이야 국경도 나이도 없는 것은 고금동서에 다 통하는 진리이기도 하지만, 아비의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당시 풍조에 비춰 볼 때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그만이 패륜아라는 멍에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도 천하명군으로 일컬어지고,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도 존경해 마지않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윤리적인 점에서는 양제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형과 동생을 암살하고, 아비를 유폐시키고 황위에 오른 사람이다. 이세민은 그가 죽인 친동생 원길(元吉)의 아내(楊妃)를 비로 삼았고 아들(明)도 낳았다. 당 고종도 아비의 후비인 무측천(武則天)을 황후로 삼았으며, 현종 역시 며느리였던 양귀비를 아내로 삼았다.
대학 시절 이런 역사적 사실을 처음 접하고는 황제들의 이런 망나니 같은 행위도 그렇지만 그 여인들의 미모가 도대체 얼마나 절색이었길래 그런 부도덕한 행위가 자행되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당대의 미녀는 ‘이영자’형이 대부분이라 요즈음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공부해 가면서 알고는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황실에 만연한 이런 퇴폐풍조(?)를 그들의 혈통과 연결시키는 설이 유력하다. 양씨는 관중 홍농(弘農)의 명문이며 후한의 대유(大儒) 양진(楊震)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지만, 당 황실과 같이 소위 호한(胡漢) 혼혈(混血)의 ‘관롱집단’(關豌集團) 출신이었다. 양제의 어머니 독고황후와 당 고조 이연(李淵)의 어머니 독고씨는 자매간이니 둘 관계는 이종사촌이었다. 수·당 초기의 황실의 외척의 대부분은 의심할 수 없는 유목민족 출신들이다. 유목민족은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자기를 낳은 생모 이외의 아버지의 처첩을 자기 소유로 하는 풍습이 있고, 이들도 그런 습속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다.
살부살형한 양제는 천하의 폭군으로, 축부살형제(逐父殺兄弟)한 당 태종은 천하의 명군으로 후세의 평가가 갈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필자가 내린 결론은 비교적 간단하다. 자고로 진리란 복잡한 논리구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삼척동자에게도 이해되는 간단명료한 것이다. 우선 후손을 잘 두어야 하고, 그 자신이 직접 망국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일해재단(日海財團)을 만들어 ‘상황’(上皇)으로서 부하를 계속 권좌에 앉히려 했던 것이고, 김영삼 전 대통령도 IMF사태를 어떻게든 막아 다음 왕조(정권)로 넘기려 했던 것이다. 당 태종이 죽은 후 당나라는 200여년간 지속되었다. 그동안 당 태종은 그의 후손 황제들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미화된 반면, 양제의 평가는 그를 넘어뜨린 자들과 그 후손들에 의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왜곡되고 폄하되어갔다. 정치가들은 걸핏하면 후세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말하지만 사실 역사가의 평가란 그렇게 공정한 것만도 아니다. 승자에게는 너무 헤프고, 패자에게는 너무 짠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그들은 간혹 스스로 자청해서 권력의 시녀가 되기도 하고, 권력자들에게 강요받아 시녀가 되기도 했다. 양제가 당 태종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기도 했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 진보진영의 주장처럼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양제의 영혼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면 이 점을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양제가 필자 같은 영향력 없는 역사연구자에게 그 곡직(曲直)을 따져 달라고 추파를 던질 일은 만무할 것이니 그의 무덤을 찾아 주는 것 외에는 그에게 베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집안의 내력은 위조할 수 있지만, 타고난 기질을 고칠 수는 없는 법이다. 중국 역사상 양씨가 천하를 얻은 것처럼 손쉬웠던 적이 없다는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수 문제 양견은 북주(北周) 마지막 황제인 정제(靜帝)의 외조부라는 지위를 이용해 ‘편안하게 앉아서 제위를 훔친’(安坐而攘帝位) 자였다. 양견이 북주 종실의 사돈이 된 것은 오히려 그의 집안이 대단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2급 귀족이어서 황실을 위협하지 않으리라는 북주 황실의 당초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이 뜻하지 않게 천하를 얻고 보니, 요즈음 졸부들의 그것처럼 하는 일이 다 자연스럽지 못하기 일쑤였다.
쉽게 얻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창출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그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창업자들이 유목민족 출신이거나 그 영향을 짙게 받았던 북조 이래 당조까지의 왕조에서는 황제라는 자리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황실 가문(Royal Family)이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는 힘 세고 능력 있는 자가 계승 1순위였다. 농경지역의 왕조에서 그 능력에 관계없이 적장자를 중시하는 전통과는 다르다. 이런 왕권을 농경지역의 의례적 왕권(Ritual Kingship)에 비해 개인적 왕권 (Personal Kingship)이라 한다.
당시 황제위를 산에서 저잣거리로 내려온 토끼에 비유한 “수서”(隋書)의 귀절이 있다. 옥좌(玉座)를 빼앗아 차지하는 자가 임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황의 유업을 충실히 보수(保守)하기보다 새로운 과업을 자꾸 벌여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황제위를 얻고, 또 그것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수 문제도, 양제도, 당 태종도 군대를 끌고 직접 전쟁에 나서(親征) 전공을 세우려 한 것이다. 이들이 고구려 침략을 위해 요동(遼東)지역까지 몸소 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안정성이 없다는 말이다. 쉽게 얻은 재산은 쉽게 잃어버리듯 쉽게 얻은 권력 또한 쉽게 잃어버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벼락부자나 벼락감투를 얻은 사람의 행동에는 안정성이 없는 것이다.
양제가 괴로워했던 것은 보다 많은 것을 이룩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빨리 뭔가를 보여주어야 되겠다는, 즉 시간과의 쓸데없는 경쟁에 말려든 것이다. 뭔가 빨리 이룩해야 한다는 초조감이다.
그 사람도 요즈음의 우리처럼 ‘빨리 빨리 환자’였던 것이다. 벼락부자는 자기과시가 본성처럼 나타나듯이 벼락출세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못난 것을 억지로 잘나 보이게 하려는 것은 이처럼 꼬인 사람들의 심리상태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자기과시는 과소비로 표출된다. 과소비는 너무 돈을 쉽게 번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불로소득이 없었더라면 과소비 현상은 결코 생기기 않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양제시대의 두가지 사건은 고구려 침략과 대운하 건설이다.

양제가 연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침략에 집착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벼락출세로 인한 취약한 황제 권력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 나름의 불가피한 조처였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사람들에게는 쉽게 순종하려 들지 않는 고구려를 그 앞에 어떻게 꿇어앉게 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 영역으로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가만히 있는 대국 수나라를 소국인 고구려가 먼저 건드릴 리는 없다. 전쟁의 빌미를 찾아 정국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려는 양제의 의도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전쟁은 ‘총풍사건’(銃風事件)이었다고나 할까.
둘째, 수나라는 원래 군벌연합정권이었다. 즉, 현재 내몽고자치주의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에서 음산산맥을 넘어 40여km에 위치해 있는 무천진(武川鎭)의 군벌을 토대로 성립된 정권이었다. 한마디로 군인들이 세운 왕조였다. 문제도 양제도 역시 군인이었고 그를 둘러싼 각료들도 대부분 군인들이었다.
군인이란 전쟁에 종군하는 것이 직업이고 전쟁이 없으면 출세할 수 없다. 그래서 늘상 전쟁이 터졌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이 군인의 속성이다. 그리고 한번 실패하면 ‘이번에야말로’ 하고 벼르며 명예회복을 위하여 한층 더 전쟁의 욕구에 사로잡히는 것이 군인이다. 단번에 성공을 거두었다면 몰라도, 실패가 거듭될수록 집착은 더욱 심해가고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 것은 양제의 조급증 때문이었다. 결국 고구려전쟁은 수나라의 망국을 재촉한 한 축이 되었다.
또 하나의 축은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그것도 또 다른 의미의 과소비였다. 둘 다 인민의 피나는 노력이 강요되는 일이었다. 과도한 노역은 백성에게는 재난처럼 여겨졌다. 양제는 토목공사에 누구보다 많은 공력을 들였다. 동도(東都) 낙양의 건설이 그러하며, 장성(長城)의 재축조가 그러하며, 운하의 건설이 그러했다. 운하는 진시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 수 양제가 처음 만든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하나의 시설이나 제도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300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제가 그러했고, 운하가 그러했다. 공교롭게 두 가지가 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양제는 특히 운하 건설에 심혈을 기울인 황제였다.

영제거(永濟渠 : 黃河 北岸~ 郡)
광통거(廣通渠 : 長安~潼關)
통제거(通濟渠 : 洛陽 西苑~淮河)
한구(距溝, 일명 山陽瀆 : 淮河~長江)
강남하(江南河 : 京口~余杭) 로 이루어진 대운하 가운데, 문제 때 완공된 광통거와 한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양제 때(605∼610) 모두 완성되었다. 6년 동안 공사에 동원된 인원만 5백50만명, 그 노역의 처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어 공사중에 죽거나 도망친 자가 2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희생 위에 서는 장안, 북은 탁군(涵郡), 남은 여항(余杭)에 이르는 중요도시가 수로로 연결되었으니 총 길이는 1,750km였다. 건설 시초부터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운하는 산업용보다 위락용으로 쓰였고, 그것 때문에 그의 업적은 크게 폄하되었다. 당대의 시인 피일휴(皮日休)는 ‘변하회고’(薦河懷古)라는 시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나라 망한 것이 이 운하 때문이라 할지라도
(盡管隋亡爲此河)
지금도 천리나 그 물길 따라 파도를 헤쳐가고 있으니
(至今千里賴通波)
만약 수전과 용주와 같은 것이 없었더라면
(若無水殿龍舟事)
우임금의 공과 같이 논해도 적고 많고를 따질 수 없으리니
(共禹論功不少多)

이처럼 운하를 이용한 그의 지나친 유락이 없었더라면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운하의 개통과, 우임금의 치수와,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같이 논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의 대역사(大役事)였다. 피시인의 말처럼 양제의 운하 건설은 우임금의 공적과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북의 정치적, 경제적 통일은 이 운하의 개통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판 운하는 지금도 이용되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 우임금의 그것보다 후세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치는 누구에게나 나쁜 것이지만, 특히 정치인에게 가장 나쁜 것이다. 그래서 고관 부인의 옷로비 사건이 그렇게 세간에 문제되었던 것이다. 양제가 만약 황제가 될 때까지 가졌던 인내와 마음가짐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그의 운명의 방향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그가 태어난 환경을 초월하기는 힘든 것이다.
수 양제는 양주를 무척 좋아했던 인물이다. 그는 젊은 날 강남 원정에서 공을 세웠고, 그후 강남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양주총관(揚州總管)으로 강도(江都)에 부임하여 강남 출신 소씨(蕭氏)를 부인으로 맞는 등 10년 세월 동안 강남문화의 정수를 맛보며 지냈다. 그는 오어(吳語 :강남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정도로 강남문화에 익숙했다. 양주를 당시에는 강도라고 불렀다. 지금도 양주 동쪽 교외의 조그마한 지역을 강도현이라 하니 옛이름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지만 수나라 때의 영화는 간 데 없다.
양제 시기의 강도는 실제 수도나 다름없었다. 양제는 세차례나 강도에 갔고, 수도에 있었던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양제의 1차 강도 출행은 대업 원년(605) 8월이었다. 대운하의 1기 공정인 통제거의 완공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운하의 건설을 위해 하남 회북의 백성 총 100여만명이 동원되었다. 이미 완공된 한구를 너비 40보로 다시 확장하고, 운하길을 따라 ‘어도’(御道)를 건설하고 버드나무(柳樹)를 심었다. 당대 사회시인 백낙천(白樂天)의 ‘신악부’(新樂府) 가운데 ‘수제류’(隋堤柳)는 당시 이 운하길과 버드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준다.

대업년간 수의 양제
(大業年中煬天子)
흐르는 물을 끼고 버드나무 심어 행렬을 만드니
(種柳成行夾流水)
서쪽 황하에서 동쪽 회수에 이르기까지
(西自黃河東至淮)
푸른 그늘이 일천삼백리나 되도다
(綠影一千三百里)
… … …

강도로의 남행길 방자한 놀이뿐인데
(南幸江都恣佚遊)
앞으로 필시 이 버드나무에 용주를 매어 둘 것이니
(應將此柳繫龍舟)
… … …
천하 재력은 이때 바닥나고
(海內財力此時竭)
배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웃음소리 어느 날에 그칠 것인지?
(舟中歌笑何日休)
… … …
후왕이 왜 전왕을 거울삼아야 하는가?
(後王何以鑒前王)
수 운하 둑 위에 심어진 망국수를 보면 알 것을!
(請看隋堤亡國樹)

그의 첫 양주 출행은 사치의 극치를 이룬 것이었다. 낙양의 현인궁(顯仁宮)을 떠나 낙구(洛口)에서 용선(龍船 혹은 龍舟)을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용선은 높이 45척(尺)에 너비 50척, 길이 200장(丈)으로, 최상층에는 정전(正殿)과 내전(內殿)과 동서조당(東西朝堂)이 있었고, 중간의 양층에는 120개의 방이 있었다. 최하층에는 내시가 거주하였다. 그 화려함은 여기서 상론할 필요가 없지만, 1,080인이 3개조로 나누어 끌었다. 이동식 궁전이었다. 따로 황후가 타는 상리주(翔土陸舟 : 뿔 없는 용선)가 있었으니 900인이 끌었다.
미인, 수행관료 등이 탄 배 9척을 포함해 당시 낙구를 출발한 선단은 모두 5,191척으로 구성되었다. 그 뱃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이어진 행렬이 200리에 뻗어 있었다고 한다. 강과 육지가 오색찬란한 장막을 이루었고 말을 탄 기병이 양쪽 언덕을 호위해 행진하니 호위하는 병사들의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고, 줄이은 깃발은 하늘을 가렸다고 한다. 지나는 주·현(州縣) 500리 내에 영을 내려 음식을 헌상하도록 하니 많은 곳은 한 주에 100수레나 되었다고 하며 모두가 산해진미요, 진수성찬이었다. 후궁들이 실컷 먹고 남아돌아, 떠날 때는 모두 땅에 묻고 떠났다고 한다. 고대 조선사상, 해운사상 전대미문의 대 파노라마였다.
배만 화려했던 것이 아니었다. 용주를 끄는 사람(殿脚이라 한다)에게 금채의포(金彩衣袍)를 입혔다. 채의(彩衣)를 입힌 자가 9,000여명, 배를 끄는 자를 합치면 8만명이었다. 양제의 용선과 후비가 탄 배는 오월(吳越)지구에서 선발한 미모의 전각녀(殿脚女)를 썼다. 8월 낙구를 출발한 선단은 10월에 강도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정월 동도 낙양이 완공되었다는 우문개(宇文愷)의 연락을 받고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3월 강도를 떠나 4월에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후 대업 3년 양제는 친히 50만 군대와 군마 1만필을 거느리고 장성 이북지역을 순행하였다. 이때 거대한 이동식 궁정인 관풍행전(觀風行殿)과 둘레 4km나 되는 조립식 성인 육합성(六合城)을 만들었다. 수나라의 국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한 허세 부리기였다. 졸부의 과소비를 연상시킨다.
이런 허세는 백성을 도탄으로 밀어넣었다. 대업 8년(612) 1차 고구려 침략의 실패에 이어 9년 2차 침략 중 반란으로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공교롭게도 양제가 황태자가 되는 데 명참모 역할을 한 양소(楊素)의 아들 양현감(楊玄感)이 제일 먼저 양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것도 양제가 고구려 친정길에 나가 싸우고 있던 배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오늘의 참모가 내일은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만큼 좋은 것도 없고, 또 그 세계만큼 비정한 것도 없다. 수나라 문제 양견은 외손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에 또 너무 쉽게 잃을 것을 염려한 양견은 황실 우문씨 자손을 멸문시켜 버렸다. 양씨가 권력을 빼앗고 그 족속을 멸족시켰던 우문이라는 성을 가진 자가 다시 그를 죽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양제의 죽음을 지하에서 지켜 본 그 아비 문제 양견이 그때 우문씨 모두를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길 없지만 양제의 가장 가까운 신하였고, 두차례나 고구려 원정의 총사령관을 맡겼던 우문술(宇文述)의 장남인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양제의 목숨을 요구했던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양제를 호위하는 친위군인 우둔위(右屯衛)의 장군이었고, 그의 동생 사급(士及)은 바로 양제의 딸 남양공주(南陽公主)의 남편으로 부마였던 것이다. 하늘은 양제를 죽이고 그 자손마저 죽이는 일을 하필 우문씨(우문화급이 북주의 황실과 同姓이나 同宗은 아니다)의 손을 빌려 치르게 하였으니 ‘하늘이 되돌려 주기를 좋아한(天道好還) 결과였다’는 청대 학자 조익(趙翼)의 지적이 실감난다.
양제는 고구려 침략전에 골몰하다 회군 후에는 장안이나 낙양으로 돌아가기보다 양주로 가 체류했다. 그는 양주가 좋아서 이곳에 머물렀지만, 그를 근위하는 병사(驍果衛의 兵)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 장안 부근 사람들이었다. 그들 눈에는 양제가 양주의 기후나 풍물에 빠져 그대로 영구히 이곳에 머무를 것처럼 보였다. 이미 전국은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군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척들의 안부를 알고 싶었다. 강도에서의 양제의 생활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궁중 100여 개의 방에 미녀를 집어넣고 매일밤 한방씩 골라 찾는 향락에 빠졌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었다. 매일 점쟁이를 불러 하루의 운명을 점치게 하거나 술로 고통을 달래고 있었다.
양제는 결국 근위병의 병변(兵變 : 쿠데타)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양제는 죽음 직전에도 자기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동안 부귀영화를 같이 나눈 자들에게 죽음을 당해야 하는 처지를 그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한때 그의 부하였던 마문거(馬文擧)가 그에게 염주알을 세듯 그의 죄상을 늘어놓는다. 각지로의 무분별한 순행과 대토목공사로 인한 노역, 연속적인 대외전쟁으로 인한 백성의 사상(死傷)과 이산, 그리고 간신(奸臣)을 가까이 하고 올바르고 쓴소리 하는 간신(諫臣)을 멀리 한 죄상 등이 그것이다.
양제는 머리를 떨구며 “백성들에게는 진실로 미안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제까지 부귀영화를 같이 누리지 않았던가?”라고 책망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처럼 백성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불변의 진리는 알았으나, 신하에게 망국의 탓을 돌리는 것을 보니 무한권력을 휘두른 자는 무한책임도 져야 한다는 단순한 원리마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위해 울어준 사람은 그가 만년에 가장 아끼던 열두살짜리 어린 아들 양고(楊豈)뿐이었다. 배거통(裴擧通)이 한칼에 그 아들의 목을 치자 선혈이 양제의 옷을 붉게 적셨다. 조금 전까지 그를 호위했던 근위병들이 고성을 지르며 그의 명을 재촉한다. 이어 근위병 하나가 그에게 자결할 칼을 건네자 그는 그동안 앉았던 가자(架子)에 올라 황제로서 마지막 명을 내린다.
“제후의 피가 땅에 스며들어도 한발이 생긴다고 하는데, 하물며 천자의 것이랴!”하며, 짐주(情酒 : 짐조의 독이 든 술)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를 고통없이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옛 부하들의 결정에 따라 그는 마지막 소원마저 거절당했다. 그는 이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촌부의 재량권마저 갖지 못한 일개 피체형자의 처지에 불과했다. 권력자가 권좌에서 물러나면 일개 초동보다 못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그가 죽은 것은 대업 14년(618) 3월 11일의 일이었다. 50세의 나이에 즉위 후 14년만이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역사서에서는 ‘강도지변’(江都之變)이라 한다. 외정(外征)과 순유(巡遊)로 서울 대흥성(大興城 : 장안)에 체류했던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시간에 쫓기며 일생을 분주하게 살았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도 요즈음의 정객들처럼 입만 열면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고 뇌까렸지만,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양제가 죽었을 때 그를 지켜 준 사람은 그 많던 궁녀도, 그를 따르던 시신(侍臣)도 아니었다. 양제는 일찍이 죽음을 예상하고 짐주를 준비하여 두 총희에게 맡겨두었다. 그는 그녀들에게 “적이 오거든 너희들이 먼저 이 술을 마시거라. 이어 짐도 마시겠노라”고 했다. 사람이 저승사자를 따라 저승으로 가는 길에는 혼자뿐이라지만, 그는 혼자 죽기가 그렇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가 아끼던 총희들은 반란병들이 궁정으로 몰려들자 자기의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자는 그의 갖은 비행(非行)에도 묵묵히 35년간 정비로서 그의 곁을 지켰던 수나라판 조강지처(?) 소황후(蕭皇后)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훔치면서 남편에 대한 마지막 뒷치닥거리를 맡았다.
몇 명의 궁녀로 하여금 나무를 쪼개 몇 조각의 판자를 만들도록 하여 못을 쳐 하나의 허름한 관(薄棺)을 준비하게 했다. 그 속에 양제와 만년에 가장 총애했던 어린 아들 고(豈)의 시체를 같이 넣어 빈장(殯葬)했다고 전한다. 물론 양제의 이런 비참한 죽음과 수왕조의 멸망에 대해 절의를 시킨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뜻이 진정 양제를 위한 것이었는가는 고찰의 대상이다.
당 고조 이연이 강남을 평정하고, 이종사촌인 양제를 오공대(吳公臺) 동쪽 뇌당(雷塘 : 현재 양주시 서북 약 3km 지점의 江槐泗鄕)에 황제의 예를 갖추어 이장하였다고 한다. 소황후는 우문화급을 따라 북상하다 화급이 전쟁에 패하자 다시 반란집단 두건덕 진영에 들어가는 운명이 되었다. 돌궐 처라가한(處羅可汗)이 그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영입해갔다.
하늘이 양씨의 제사만이라도 지내 주도록 유일하게 남겨둔 혈손(秦王 俊의 자, 文帝의 孫) 호(浩)도 소황후와 함께 돌궐에 머무르다 당 초에 장안으로 돌아왔다고 전하나 그가 성묘차 한번이라도 양제의 묘를 찾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황후로서의 영화와 망국 망부의 아픔을 맛보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소황후는 당 태종 정관 22년(648)에 사망한 후 양제와 합장되었다고 한다.
양주 북동쪽 교외에 ‘수 양제의 릉’이라고 일컬어지는 무덤이 있다. 청 말 이곳의 지방장관으로 부임한 저명한 학자인 완원(阮元)이 당시까지 양제의 무덤이라 전해지던 곳에 묘비를 세워 그가 누운 장소임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수양제릉 - 대청 가경 12년(1807) 본향 전 절강순무 완원이 돌을 세우고, 양주부 지부 정주 이병수가 쓰다’(隋煬帝陵 -大淸嘉慶十二年在籍前浙江巡撫阮元建石 揚州府知府汀州伊秉綬額)라는 묘비는 세워져 있으나 그 묘 안에 누워 있는 주인이 실제 양제인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역사서에서 그렇게 크게 다루어지는 양제의 묘치고는 너무도 초라하다. 봉분에는 잔디보다 쑥이 더 무성하다. 그 묘는 세인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안내를 맡았던 양주박물관 직원도 세차례나 차를 세우고 물어서야 그 장소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수 양제의 묘를 찾는 사람은 그렇게도 없는 모양이다. 당 태종의 묘가 그렇게 당당한 것과는 달리 망국의 황제 양제의 묘는 이렇게 버려져 있었다.
수 양제는 전혀 돈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조그마한 유적이라도 울타리를 치고, 문을 세우고, 돈을 징수하는 돈맛 알기로 유명한 중국인들마저 양제를 가지고는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묘 앞의 웅덩이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연방 하품만 해대는 물소 한 마리가 이국에서 온 몇 명의 손님을 대하고 있었다. 웅덩이 앞의 흙길 도로를 사이로 하고 두 점포가 마주하고 있다.
이름하여 ‘수양제 스낵’(隋煬小吃部)과 ‘수양제 이발관’(隋煬理髮店)이다. 주인도 손님도 없는 두 점포의 처마에 걸려 있는 간판만이 한낮의 햇살에 바래고 있다.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져 있다. 아마도 죽은 수 양제의 영혼이 간혹 와서 이발하고 요기하는 점포이리라. 이런 곳을 보기 위해 우리 저명한 학자들을 몇명씩이나 이곳 양주까지 우겨 데려 온 내가 정말 머쓱했다. 중국인들은 나보다 훨씬 현명했던 것 같다. 이 시대 역사를 공부하고 양제에 대해 논문 한편을 발표한 나보다 역사적 현실에 접근하는 태도가 분명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묘주가 양제인지 아닌지가 그리 중요한가. 그 묘주가 양제냐 아니냐의 여부는 고고학자의 몫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역사란 원래 의미부여를 주로 하는 학문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제의 묘를 찾기 위해 두번이나 이 먼 이국 양주땅을 찾은 내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장사 안되는 양제 관계 논문은 이제 그만 써야 되겠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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