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塞上에 울던 비운의 여인이 민족 우호의 영웅으로
 관리자  07-25 | VIEW : 3,236
塞上에 울던 비운의 여인이 민족 우호의 영웅으로

王昭君의 유적을 찾아서

朴漢濟 : 46년 경남 진주(진양) 출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96~97년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저서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일조각, 1988) “인생-나의 五十自述” (한길사, 1997)

중국 내몽고자치주 수도 呼和浩特 서남 들판에 하나의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王昭君墓라 한다. 내몽고 초원 관광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지만 가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의 역사 전개는 중원의 농경민족과 초원의 유목민족간, 즉 胡·漢의 투쟁의 역사라고 한다. 왕소군은 몇천년에 걸친 호·한의 역사의 실체가 어떠했는가를 잘 반영하는 인물이다. 나라가 병약하면 民草가 고단하고 특히 여인이 비참해진다. 왕소군은 한나라 조정 궁녀의 몸으로 삭풍이 불어대는 塞上 匈奴 땅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다.
그의 인생은 순국자처럼 장렬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많은 詩人墨客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들의 따뜻한 가슴을 거쳐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되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왔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民族和合의 英雄’이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닥친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저 슬피 울었던 가냘픈 여인이었을 뿐이다. 국가를 위하고, 민족 단결을 위해 그가 기꺼이 희생한 것 같지는 않다. 역사는 진실해야만 힘이 있고 그 생명력 또한 길다. 조작은 잠시의 만족을 줄지 모르지만 금방 역겨움으로 남는다. 왕소군묘를 돌아보고 느낀 솔직한 감정이다.

왜 나는 남의 무덤만 찾아 나서는 것일까? 국토가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가니 납골당(納骨堂)을 만들라, 30년 이상 된 무덤을 파헤쳐 화장(火葬)하라는 등 야단인 시기에 하필 2,000년 전에 죽은 사람들, 그것도 외국 사람들의 무덤을 찾아 나서니 스스로 생각해도 분명 정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구조조정으로, 혹은 정년퇴직으로 학교에서 물러난 후 생계를 잇기 위해 남의 묘자리 봐주는 풍수지관(風水地官)이 되려고 작정하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러하니 남들이 보면 오죽하랴. 실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아무리 어여삐 여기더라도 소위 ‘신지식인’(新知識人)에는 낄 리 만무하다.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해서 몇년 전부터 어렵사리 핸드폰까지 마련해 지니고 다녀도 누구 하나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
천성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옛것을 다루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지 어언 30년이 지난지라 하는 짓이 넝마주이처럼 남(옛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뒤지는 것이 일상사가 돼버렸다. 조금 오래 되었다 싶으면 하찮은 메모지마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는 분명 난치의 직업병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옛사람의 무덤이 어떠하다느니,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생각했느니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들려주는 강의지만, 그런대로 ‘쪽수’는 차 폐강을 면해 하루 세끼 연명해 갈 수 있으니, 이렇게 남들이 소용없다고 여기는 것만 계속 파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방학만 되면 돈만 쓰는 중국 여행길에 나서는 것이다.
이런 나를 아내는 역마(驛馬)살이 끼었다고 불평하고, 동료들은 중국에 ‘작은 집’을 차렸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나이가 이쯤되면 유럽이나 미국 여행 정도는 했을 법한데 외국여행이라야 동아시아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데도 무엇이 그리도 보아야 할 것이 많은지 계속 중국에만 가니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까지 배운 것이 이것뿐이고, 이 길밖에 다른 길이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으니.

내가 왕소군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읽은 이백(李白)의 시 ‘왕소군’을 통해서였다. 그후 그 가냘픈 여인의 영상이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있었다. 햇병아리 강사 시절 동양문화사(東洋文化史) 강의 첫시간에는 늘상 학생들의 반응 여하에 상관없이 이 왕소군 이야기에 열을 올리곤 했다. 더욱이 박사학위 논문부터 지금까지 연구주제가 유목민족인 호족과 농경민족인 한족의 관계를 다루는 소위 ‘호한체제’(胡漢體制)라는 것이어서 왕소군은 이래저래 나의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누군가 중국사의 전개를 남쪽 중원의 농경민과 북쪽 초원의 유목민간의 투쟁의 역사라고 하였지만, 흉노(匈奴)가 초원지역을 통일한 이후 중원 왕조는 끊임없이 유목민족의 침략에 시달려 왔다. 한나라 무제(武帝)처럼 간혹 정벌을 행하기도 하였지만, 돈과 물자를 주어 달래는 것이 전쟁비용보다 훨씬 싸게 먹혀 역대 정권은 소위 화친(和親)정책을 취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이었다. 화친정책이란 흡사 우리나라의 대북포용정책(對北包容政策)처럼 그들이 요구하는 소위 세폐(歲幣)라 지칭되는 각종 물품을 시도 때도 없이 보냄으로써 평화를 사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것 가운데는 흉노의 왕인‘선우’(單于)에게 시집가는 황실의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번국(蕃國)과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종의 외교사절인 이들 여인을 화번공주(和蕃公主)라 일컫는다. 공주라 하지만 황제의 여식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화번공주를 보내는 것 자체가 결코 대등한 관계라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중국 황제가 그 여식까지 보낼 정도로 굴욕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형편이니, 흉노도 그 점은 양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흉노의 선우도 중국 황실의 공주를 얻었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진가(眞假)를 따지지 않고 짐짓 모른 척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유목민족은 이런 명분도 명분이지만, 이들 화번공주가 시집올 때 가져오는 혼수품에서 더 실리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자장비(資裝費)라 하였는데, 예컨대 당대의 경우 이 자장비가 국가재정에 큰 주름살을 지울 정도로 그 액수가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 민간에도 ‘딸 셋 시집보낸 집은 도둑도 본체만체한다’는 말이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딸 시집보내는 것은 그 집 기둥 뿌리를 흔드는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화번공주는 흉노의 왕인 선우에게 시집가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략결혼의 희생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영광스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산 설고 물 선 이국 땅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여인들의 슬픈 이야기는 종군위안부의 그것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상 화번공주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북방 유목민족 지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수없이 많지만, 한대의 오손공주(烏孫公主) 세군(細君), 왕소군, 채문희(蔡文姬) 등과 당대의 문성공주(文成公主)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후세에 가장 화제가 된 여인은 채문희와 왕소군이라 할 것이다.

흉노의 선우는 농경족의 여인을 좋아하였다. 우리가 대개 그러한 것처럼 이국색의 여인은 아침 저녁 항상 보아 식상한 여인들보다 분명 낫게 보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상 거친 가죽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달리며 가축의 젖을 짜는 일에는 남자에 못지않는 막가는(?) 초원 여자와 달리 비단 옷에 파묻혀 고운 얼굴을 수줍은 듯 드러내는 한족 여인들은 그들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일찍이 묵특(冒頓)선우는 한 고조 유방(劉邦)이 죽자 과부로서 정치적 실권을 휘두르던 여태후(呂太后)에게 매우 외설적이고 무례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고독에 번민하고 있는 나는 늪지대에서 나서 말이 마구 달리는 평원 광야에서 자랐다. 이따금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노닐기를 원하였더라. 지금 폐하도 혼자된 몸, 나 또한 혼자 있어 두 임금이 모두 쓸쓸하니 우리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바꿈이 어떠하리.(孤奪之君 生於沮澤之中 長於平野牛馬之域 數至邊境 願遊中國. 陛下獨立 孤奪 獨居. 兩主不樂 無以自虞 願以所有 易其所無)

이상이 대충 그 편지의 요지였다. 이 편지를 받은 여태후가 대노했다고 책에는 쓰여 있지만, 속마음이 진정 그랬는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중국 역대 비극적 여인의 전형처럼 흔히 거론되는 채문희의 본명은 채염(蔡琰)으로 후한말 저명한 학자인 채옹(蔡邕)의 딸이다. 채염의 일생은 비참의 연속이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모함에 빠져 삭방(朔方)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2년 후 사면받았지만 돌아오는 중에 중상시(中常侍) 왕보(王甫)의 동생인 오원(五原)태수 왕지(王智)의 미움을 사게 되어 12년간 강해(江海)지역으로 망명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고에 찬 유랑생활 끝에 낙양으로 돌아온 채옹은 다시 동탁(董卓)의 협박에 못이겨 좌중랑장(左中郞將)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동탁이 피살되자 그 일 때문에 또다시 사도 왕윤(王允)에게 잡혀 옥중에서 처형된다. 아버지의 인생도 기구했지만 채문희의 인생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또 다시 아리따운 여자라는 이유가 보태져 더욱 처절했다.
낙양에 돌아와 비교적 평화롭게 살던 짧은 시기에 채문희는 하동(河東) 위중도(衛仲道)라는 자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행복도 잠깐,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고 자식마저 없어 채문희는 고향 진류(陳留·開封 남방)로 돌아왔다. 난리가 나면 가장 불쌍한 자는 여자와 애들이라던가? 동탁의 부장 이각(李杆)과 곽사(郭 解)의 무리를 격퇴하기 위해 남흉노 선우 주천립(廚泉立)이 우현왕 거비(去卑)에게 1,000기(騎)를 주어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장안에서 수도 낙양으로 호위해 가도록 했는데, 채문희는 그 흉노의 기마병에게 납치되어 흉노 좌현왕에게 바쳐졌다.
남흉노에서 또다시 12년, 그 왕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낳았다. 후한말 정권을 쟁취한 조조(曹操)는 흉노에 사신을 보내 거금을 지불하고 속면시켜(遣使以金璧贖之) 애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했다. 조조와 채옹은 평소 친숙한 관계였는데 채옹이 후손이 없이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애들을 대동할 수 없었다. 이렇게 유랑과 곤경으로 점철된 반평생이 사실적으로 서술된 장문의 시가 바로 유명한 ‘비분시’(悲憤詩) 2장이다. 특히 흉노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와의 헤어짐을 표현한 부분은 천고의 절창(絶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일부를 전재해 보자.

아들은 내게 달려들어 목에 매달리며(兒前抱我頸)
어머니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問母欲何之)
사람들은 어머니가 꼭 가야 한다고 하는데(人言母當去)
다시 돌아올 날이 있을까요(豈復有還時)
언제나 어질고 정답던 어머니가(阿母常仁惻)
이제 무슨 까닭으로 다시 모질어졌나요(今何更不慈)
아직은 어린 우리들을(我尙未成人)
어찌 다시 한번 생각해 주지 않으시나요(奈何不顧思)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듯하고(見此崩五內)
정신이 아득하여 미칠 것 같습니다.(恍惚生狂癡)
울면서 꼭 부둥켜 안으면(號泣手撫摩)
떠날 마음 혹시 다시 돌이킬까요(當發復回疑)

이 시는 대개 채문희가 직접 쓴 작품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인데 그 원문은 ‘후한서’(後漢書)(권 84 列女傳 董祀妻傳)에 실려 있다. 이렇게 목에 매달리는 애들을 되놈의 땅에 그냥 놓아두고 채문희는 단신 한나라로 돌아왔다. 당시 그가 처한 형편은 ‘나무꾼과 선녀’ 속의 선녀보다 낫지 않았다. 돈 받고 그를 놓아주는 좌현왕은 나무꾼보다 나을 것이 없고, 채문희 역시 선녀보다 모성애가 두텁다고 볼 수도 없다.
조조의 호의로 한나라로 돌아온 채문희는 다시 동사(董祀)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선녀가 하늘에 올라가 재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으니 채문희가 선녀보다 정숙한 여인이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팔자가 센 여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를 만나는 남자마다 죽거나 감옥행이니 말이다. 동사는 둔전도위(屯田都尉)의 벼슬에 있을 때 범법행위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채문희는 다시 조조를 찾아가 남편의 구명을 청한다. 조조는 그를 가엽게 생각하여 동사를 사면하고 그로 하여금 이미 망실된 아비 채옹의 글을 기억해 써 올리도록 시켰다. 그는 하도 명석하여 400여편의 글을 기억해냈다는 것이 그의 일생에 대한 사서 기록의 전부이다.
채문희의 생애는 송대 어느 화가가 그려 현재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채문희귀한도(蔡文姬歸漢圖) 덕분에 서양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시기인 1959년 중국에서는 “문학유산”(文學遺産)지를 중심으로 소위 채문희의 ‘호가십팔박’(胡茄 十八拍) 토론(논쟁)이 전개되었다. 시인묵객들은 이미 무덤마저 없는 그녀를 다시 이 세상에 불러내 그녀의 생애를 다시 요리조리 따지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호적(胡適)·정진탁(鄭振鐸)·유대걸(劉大杰) 등 학자들이 ‘호가십팔박’은 채문희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후세(唐代)인의 의작(擬作)이라고 한 것에 대해 인민중국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역사가인 동시에 정치가인 곽말약(郭末若)이 반박한 데서 시작되었다. 의작설은 이미 송대 문인 소식(蘇植∇坡)에 의해 가장 먼저 제기되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곽말약은 이들이 채문희의 인생에 대해 깊은 검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공격했지만 곽말약 자신의 주장도 반드시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 의해 전개된 소위 ‘조조재평가’(曹操再評價)운동의 일환으로 ‘호가십팔박’의 작자가 채문희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송대 이후 소위 정통관념이 확립되고, 다시 “삼국지연의”가 세상에 유행하게 됨에 따라 세살 먹은 애들마저 위대한(?) 영웅 조조를 나쁜 사람, 돼먹지 않은 간신으로 여기는 몇백년간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사실 그의 주장 뒤에는 다른 목적이 숨어 있었으니, 그것은 조조를 이용하려는 당시 정치판의 수요와 연관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조조는 황건(黃巾)농민을 조직하여 그 주력세력으로 삼고 호족(豪族)을 억압하고 빈약자를 구제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일으키는 등 30여년간 농민을 위해 노력한 영웅인 동시에 소위 건안문학(建安文學)을 중국문학사상 최고조의 경지로 끌어올린 문학 애호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조야말로 농민정권인 인민중국의 지도자상과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조조가 채문희를 구한 것은 조조의 위대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호가십팔박’이 채문희의 작품이라야 조조의 위대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조조가 구한 것은 채문희 일 개인이 아니라 당시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던 비극적 여인들의 전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조조는 사적인 감정에서 그녀를 구한 것이 아니며 인민을 위한 문치무공(文治武功)이라는 위대한 능력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호가십팔박’의 가사 내용과 당시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평이다. 당시 채문희가 납치되어 간 곳은 남흉노의 남방 근거지인 하동(河東) 평양(平陽·山西省 남부)지역으로 추정되는데 ‘호가십팔박’에 묘사된 지리환경은 음산산맥(陰山山脈) 근처를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세인들이 채문희의 생애에 의부하여 지은 문학작품일 뿐이다. 따라서 ‘진지한 감정으로 깊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호가십팔박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써내려 갈 수 없는 호시(好詩)’라는 곽말약의 강변에 수긍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때 중국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호가십팔박’ 논쟁을 보고 채문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측량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학문 연구의 동기는 순수해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이다. 학문은 알고 싶은 것을 추구할 뿐이다. 특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정치적 시녀로서의 학문 연구다.

흔히 우리에게 왕소군으로 알려진 이 여인의 본명은 왕장(王牆)이며, 소군은 자(字)다. 뒷사람들은 그를 명군(明君), 혹은 명비(明妃)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군(南郡) 자귀(嘶歸·현재 湖北省 興山縣) 출신이라 전해진다. 왕소군의 묘는 현재 내몽고자치주의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에서 남쪽으로 9km 떨어진 대청산(大靑山) 기슭, 대흑하(大黑河) 북안(北岸)에 자리잡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33m, 면적은 20여 무(畝)로 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무덤 위에는 흉노 땅에서 자라는 백초(白草)가 아니라 한나라 땅에서 자라는 청초(靑草)가 돋아났다고 하여 청총(靑塚)이라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가을이 깊어가면 사야(四野)의 초목이 모두 시들어 누런 빛으로 변해 가지만 오직 소군의 묘 위에는 여전히 ‘어린 황색 검푸름 그 풀의 푸르기가 사철 쑥같다’(嫩黃黛綠 草靑如茵)는 것이다. 이로 인해 소군묘에는 ‘푸른 무덤이 눈썹이 검푸른 미인을 안고 있다’(靑催擁黛)는 염칭(艶稱)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왕소군 묘만 푸르른 게 아니다.
북경에서 호화호특행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나무 하나 보기 힘든 초원지대를 지나게 되지만, 호화호특 근방에 이르면 수목이 울창한 평원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지역이 중국어로 청성(靑城)의 의미를 가진 호화호특이란 몽고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 전설에 의하면 소군의 묘는 그 형상이 하루에 세번이나 변한다는 것이다. ‘진시에는 봉오리같고, 오시에는 종같고 유시에는 버섯같다’(辰如峰 午如鍾 酉如土從)한 것이 그것이다. 현재 호화호특 팔경(八景)의 하나로 되어 있지만 묘 위에 올라서면 새상(塞上) 오아시스가 눈 아래 펼쳐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흔적 만들기를 매우 좋아하는 것같다. 반드시 그 사람을 기려서 그러는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지역적 자부심 혹은 이기심의 발로랄까. 아니면 후손들의 생업에 보탬을 주기 위한 먼 배려랄까? 내몽고와 산서 서북부에 왕소군의 전설이 서린 왕소군의 묘가 10여개나 있고, 그밖에도 왕소군이 울고 넘었던 고개, 왕소군의 수적(手迹)이 있는 바위 등 왕소군의 전설과 연관된 지점이 여러 군데 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사당이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무덤이 바로 호화호특에 있는 청총이다. 이 무덤이 생긴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는 소군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천궁으로 올라가는데 그녀가 한발 한발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몸이 공중으로 올라가니 사방팔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토대를 쌓아 소군을 잡아두려고 하였다. 그러던 중 돌연 커다란 울림과 함께 홍광이 비치더니 소군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토대가 곧 청총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하나는 소군이 죽은 후 사방 팔방에서 흉노인들이 옷에 흙을 안고 와서 청총을 만들었는데 그후 사람들이 계속 흙을 가져와 청총 위에 놓는 것이 관례가 됨으로써 더욱 더 높아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왕소군의 또 하나의 묘는 이극소맹(伊克昭盟) 달랍특기(達拉特旗)에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오르도스 지방에서 새외로 가기 위해 황하를 건너는 나루터이다. 지금의 철강도시 포두(包頭)를 마주보고 있는 지점인데, 이곳은 소군이 출새(出塞) 때 건넜던 옛 금진도구(金津渡口)이다. 소군은 당시 황하를 건너다 얼떨결에 비단신 한짝을 강물에 빠뜨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곳 사람들이 강을 모조리 뒤져 그 신을 찾아 나루터 근방에 묻었다. 소군이 죽자 이 나루터에 큰 뇌성과 함께 홍광이 비치더니 신을 묻은 곳에 방원(方圓) 5리, 높이 40여m의 작은 산이 문득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 다른 왕소군 묘가 생긴 사연이다.
그들 묘가 실제 왕소군과 직접 관계되는 묘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중국사를 공부하고 부터 그동안 나는 많은 미녀를 만났다. 달기(渗己)·서시(西施)·초선(貂嬋)·양귀비(楊貴妃) 등이 그들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처럼 이들 미인은 얼굴은 예뻤지만, 나라를 말아먹은 여인들이다. 성격이 표독하고 권모술수가 남자 못지않았다. 구시대적 사고를 못 버린 ‘왕’보수(保守)라고 욕하겠지만 나는 이런 타입의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를 편하게 해주고,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나는 좋다. 내가 왕소군이라는 여인에게 끌린 이유는 이렇게 간단하다. 이런 체질을 못 버린 남자는 스스로 말하지 않을 뿐, 나 외에도 더러 있을 것이다. 나는 왕소군의 묘를 두번이나 찾았다.
1996년 여름과 1999년 여름이다. 첫번째는 세 여자를 데리고 갔고, 두번째는 학회 회원이 중심이 된 38명의 여행단과 같이 갔다. 첫번째 세 여자는 결코 미녀들이라 할 수 없는 나의 가족들이다.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그들 가슴 속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왕소군?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라 하는 걸 보니 헛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고, 두 딸들은 내몽고의 찌는 듯한 여름 날씨와 초원의 열악한 화장실 사정 때문에 며칠간이나 변을 못 본 기억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왕소군은 전한 원제(元帝) 조정의 후궁이었다. 당시 남흉노 선우였던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의 부마가 됨으로써 교분을 두텁게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화번공주를 물색하게 되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책에는 왕소군이 화번공주로 선발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원제에게는 후궁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들 모두를 직접 만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궁실의 화공(畵工)을 시켜 형상을 그리게 한 후, 그 그림을 보고 불러 잠자리를 같이하곤 하였다. 궁인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많게는 10만냥, 적어도 5만냥은 주어야 했다. 왕소군만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흉노 선우가 연지(閼氏), 즉 부인으로 맞기 위해 공주 한 사람을 보내줄 것을 한나라에 청하였다.
이에 원제는 화공이 그린 그림만을 보고 소군을 선발했다. 출발에 앞서 소군을 불러 보니 후궁 가운데 미모가 제일이고, 언사와 행동거지가 출중했다. 원제는 후회했지만, 이미 명적(名籍·아그레망)이 간 이후라 상대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다른 여인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사건을 따져 화공을 모두 시장에서 목베고(棄市) 그 재산을 몰수했을 뿐이었다.
왕소군의 애달픈 사연은 역대 시인묵객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역대 우수한 문학작품만을 모아 엮은 “문원영화”(文苑英華)라는 책(권 204, 악부 13)에는 왕소군을 기리는 송대 이전 시인들의 시 35수를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이름으로 수록하고 있다. 천재 시인 이백(李伯)은 왕소군의 이 슬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소군 옥안장에 치맛자락 스치며(昭君拂玉鞍)
말에 오르매 붉은 뺨에 눈물 적시네(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 궁인이지만(今日漢宮人)
내일은 오랑캐 땅의 첩이로다(明朝胡地妾)

시라고 하는 것이 군더더기없는 몇 구절로써 독자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문학장르이기도 하지만, 왕소군이 오랑캐 땅으로 떠나는 모습이 옆에서 보는 것처럼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왕소군은 이렇게 삭풍이 불어오는 북녘 새상 땅으로 눈물을 훔치며 시집을 갔다. 동방규(東方猫)라는 시인은

한나라 힘 이제 강력하고(漢道今(初)全盛)
조정에 무신도 충분하건만(朝廷足武臣)
박명한 첩 무슨 필요 있어(何煩(須)薄命妾)
고생스럽게 화친의 먼 길을(辛苦遠和親)

이라 하여 싸움도 하지 않고 이다지 가냘픈 여인을 희생시켜 평화를 산 한나라 조정의 조처를 비난하고 있다. 동방규는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는 유명한 시귀로 왕소군의 새상에서의 생활을 묘사했으니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같지 않더라(春來不似春)
자연히 옷과 띠가 훌렁거리네(自然衣帶緩)
허리를 가늘게 하려는(미녀가 되려는) 것은 아닌데(非是覓(爲)腰身)

라 한 것이 그것이다. 왕소군이 고국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처절하리만큼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왕소군은 흉노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가 그와의 사이에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그의 남편 호한야는 결혼한 지 2년만에 죽었다. 흉노의 관습인 수계혼(收繼婚:父死妻其後母)에 따라 호한야와 흉노 귀족 호연씨(呼衍氏)의 여식 사이에 태어난 조도막고(雕陶莫皐)가 선우(復株累若熉單于)가 되자 소군은 다시 아들 뻘인 새 선우의 부인이 되었다.
그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낳았다. 새 남편과의 생활 11년만에 또 다시 선우가 죽자 그녀는 과부가 되었다. 그녀 나이 불과 33∼34세였다. 그 후 그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언급이 없다. 왕소군의 인생을 한마디로 잘라 규정기는 힘들지만, 한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이었음은 분명한 것같다.
이 가냘픈 여인의 희생 때문인지 왕소군의 소위 출새화친(出塞和親)으로 ‘몇년 동안 봉화의 불이 보이지 않고, 인민은 번성하고, 소와 말도 들판에 그득했다’(數世不見煙火之警 人民熾盛 牛馬在野)는 사서의 기록처럼 한·흉간에 평화가 도래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 조정에서 왕소군에게 거는 기대는 컸던 것 같다. 그가 출새하던 해에는 ‘변경을 안녕시켰다’는 의미로 경령(竟寧·境寧)원년이라 연호까지 바꾸었다. 흉노측에서도 왕소군을 ‘호를 편안하게 한 선우의 부인’이라는 의미의 영호연지(寧胡閼氏)로 봉하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활약에 대한 치하라기보다 그를 그렇게 봉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득을 계산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역대 중국인에게 ‘왕소군의 출새’와 흉노에서의 그의 생활은 어떤 의미를 던져 주었을까?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당시 화번공주로 뽑힌 궁녀가 5명이어서 왕소군만이 아니었는데도 그녀가 굳이 흉노로 간 것은 ‘자원’(自願)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황제가 한번도 그녀를 불러주지 않았던 데 대한 ‘비원(悲怨)의 선택’이라고 적고 있다. “후한서”의 기록은 채문희의 아버지 채옹이 지은 “금조”(琴操)라는 책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책에는 색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즉, 호한야가 죽고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실자’(實子)가 그녀와의 재혼을 재촉하자 왕소군은 아들에게 “너는 한의 인간으로 살아가려는가, 아니면 흉노의 인간으로 살아가려는가?”라고 물었다. 실자는 “흉노의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그녀는 자살의 길을 택했다고 전하고 있다. “후한서”의 찬자 범엽(范曄)이 이 사실만은 채용하지 않은 것은 냉정한 역사가로서의 그의 안목을 엿보게 하는 것이지만, 이 두가지 삽화에서 보건대 유교적 봉건 사고를 가졌던 전통 중국인에게 왕소군은 실로 ‘뜨거운 감자’였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재혼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청대 육차운(陸次雲) 같은 자는 왕소군의 출새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들뻘과 재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렇듯 왕소군이라는 여인은 중국인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게 하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왕소군은 우리, 아니 나에게는 한 여인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곱게 키운 어느 딸이 어처구니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그는 끝내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같은 입장에 있었던 오손공주나 채문희가 고국으로 돌아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돌아가지 않은, 아니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기록한 사료는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다. 그가 낳은 아들은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고, 두 딸은 각각 흉노 귀족인의 수복씨(須卜氏)와 당우씨(當于氏)의 거차(居次:공주)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그의 자식들이 흉노 조정에서 출세했기 때문에서였을까? 그를 버린 고국에 대한 비원 때문에서였을까? 아니면 근래 중국인들이 흔히 지적하듯 형제민족간의 우호의 사자로서의 임무를 죽는 날까지 다하기 위해서였을까? 그게 아니었다. 그는 흉노 땅에서 자식을 낳고부터는 한나라의 궁녀나 미인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세 아이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떤 미인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어머니의 정은 어떤 것보다 더 진한 것이다. 채문희가 매달려 울부짖는 어린 자식들을 외면하고 귀한(歸漢)한 것과 달리 왕소군은 어머니로서 충실하고자 했고, 그런 여인으로 살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러면 과연 그가 평화의 상징, 한·흉 양족의 우호의 사신이었을까? 근대 이전의 글들이 그의 애달픈 사연을 주로 노래했다면, 요즈음의 시들은 민족 우호의 사자로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들 뿐이다. 왕소군 묘에 가보면 청대에 있었다는 유적들은 다 없어지고 대신 인민중국이 성립하고 나서 세워진 것들로 채워져 있다. 왕소군 묘는 1964년 내몽고자치구 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되었다. 소위 무산계급 혁명가의 한사람인 동필무(董必武)가 1963년에 쓴 시구는 이백의 그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소군은 천추 동안 그 스스로 있을 뿐(昭君自有千秋在)
호와 한의 화친에 대한 식견 높기만 하구나(胡漢和親識見高)
글 짓는 사람 각각 (소군) 가슴 속의 번민 나타내려(詞客各攄胸臆 滿)
글 짓고 먹칠해 봐야 말짱 도로묵(舞文弄墨總徒勞)

혁명가라 불리는 정치가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북경대학 교수였던 전백찬(獰伯贊)마저 왕소군의 묘를 돌아보고 한몫 거들었다.

“내몽고 인민의 마음 속에는 왕소군은 이미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상징이다. 소군의 묘는 하나의 무덤이 아니라 민족 우호의 역사 기념탑이다”.(在內蒙古人民的心中 王昭君已經不是一個人物 而是一個象徵, 昭君墓也不是一個墳墓 而是一座民族友好的歷史紀念塔)

당시 흉노 선우정이 위치했던 외몽고 울란바토르(烏蘭巴托) 근처 어디엔가에 2,000년 넘게 고이 잠들어 있을 그를 새삼스럽게 새내로 끌어와 중화민족 화합과 단결 운동의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아니, 이런 대접에 왕소군 자신은 흡족해할지, 아니면 그 고운 눈에 다시 서글픔의 이슬을 맺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중국인들은 걸핏하면 ‘영웅’만들기에 열을 올린다. 한때 끼니 때우기도 어려운 ‘인민’들에게 그들처럼 영웅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모택동의 숭배자였던 군인 뇌봉(雷峰), 멸사봉공의 공무원인 공번삼(孔繁三), 북경의 평범한 버스 안내원인 이수려(李秀麗)가 한때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최근에는 자동차 정비공인 왕도(王濤)가 노동자의 모범으로 대서특필되고 있다. 우리로서는 선행가쯤으로 신문이나 방송에 한번 소개되고 말 듯한 착한 백성들을 가정에서 끌어내 영웅으로 만들어 몇년 혹은 몇십년 전국을 돌게 했다.
‘뇌봉을 배우자’ ‘이수려를 배워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자’ ‘수천, 수만의 왕도가 필요하다’는 플래카드나 벽보가 거리를 빽빽하게 채웠다. 그리고 ‘뇌봉연구위원회’ ‘이수려연구위원회’가 전국 각처에서 결성된다. 이 관제(官製) 영웅들의 대열 속에 이미 2,000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간 왕소군이 다시 끌려나온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내 고향 진주를 방문하기 며칠 전부터 거리에 나가 태극기 흔드는 연습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인지 왕소군 묘를 돌아보는 나의 발걸음도 그리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인민중국 성립 후, 소수민족을 억지로 중화인민공화국 속에 흡수 동화시키기 위해 중국정부는 얼마나 많이 그들을 희생시켰던가? 소위 문화대혁명 시기에 수십만명의 몽고인을 희생시키고 대신 많은 한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중화민족의 화합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몽고인들이 무자비하게 죽거나 쫓겨났다.
현재 내몽고자치구의 주인인 몽고인의 인구가 전 인구의 6%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왕소군 묘의 안내 팸플릿에는 ‘한·흉 양족의 화평우호관계를 건립하기 위해 왕소군이 자원해서 흉노 땅으로 갔고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 민족 우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연 몽고인들에게 무슨 생각을 갖게 할 것인가? 왕소군이 흘린 눈물은 진정 한·흉 우호를 위한 것이었던가? 왕소군이 고이 잠들도록 이제 그만 그를 풀어주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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