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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나라의 생존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관리자  07-25 | VIEW : 1,715
한국인은 나라의 생존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한일합방의 주인공 이토 히로부미

최용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으로서 한일합방을 주도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그는 우리에게 영원히 침략자이자 민족의 원수로 낙인찍혀 있지만 일본 국민들에게는 합리적이고 청렴한 정치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만난 이토가 들려주는 참담했던 당시 국내 정치상황과 역사적 질책.

‘유명하지만 잘 모르는 인물’.
역설적인 이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을 들자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될 것이다. 평전 “이토 히로부미”의 번역자인 배재대 강창일 교수도 지적했듯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그가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비교적 객관적인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거의 없다. 단지 그가 한일합방의 ‘원흉’이고,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인물이라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원흉인 이토가 일본에서는 ‘현대사의 영웅’으로까지 대접받고 있다. 그에 대한 전기만 해도 수십종이 넘는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인 1885년 “곤니치(今日)신문”의 ‘일본의 현대 10걸’이란 제목의 각계 인물 인기투표에서 927점을 받아 정치가 부문 1위를 하고 전체 3위를 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있던 인물이다.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할 때는 정말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과의 인식의 거리가 더욱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조선 침략의 원흉’이란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데 반해 그래도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식민지 시대인 1930년에는 일본의 대표적 정론지 “중앙공론”에 희곡 “안중근전”이 발표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안중근이 차지하는 비중과 일본에서의 그것은 100 대 1이 안될 텐데도 말이다.
우리의 경우는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전문가 수준에서도 제대로 된 책 한권 나온 것이 없다. 우리가 기록과 반성에 인색하다 하더라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원흉’이라고까지 하는 인물에 대한 이 정도의 빈약한 연구와 대중적 인식수준은 빈곤한 역사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안중근기념관까지 세워 놓고도, 그에게 피격당한 인물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하고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이러한 빈곤한 역사인식으로는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완전한 독립을 이룩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정치적 해방은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 것 베끼기에 혈안이 돼 있지 않은가? 쪽바리라고 욕하면서도 TV프로그램·드라마·출판·학술·영화·만화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로열티도 내지 않으면서 일본 것을 뻔뻔스럽게 베끼기 일색인 후안무치의 문화.
이번에 이토 히로부미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괴롭지만 우리 역사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다시는 100년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작업의 하나다.

일본 현대사의 영웅 이토

이토 히로부미 연표
1841년9월2일 야마구치현 구마게군 쓰카리 마을에서 태어나다
1858년 슈카 숀주쿠(松下村塾)에 들어가 개화파의 선구자 요시다 쇼인에게 배우다.
1862년 다카스기 신사쿠 외 12명과 함께 영국 공사관습격
1863년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영국 유학
1864년 고향인 죠슈번이 외국선을 포격하고 사쓰마번이 영국 함대와 교전한 것을 알고 귀국. 강화회담 통역으로 영국함대로 가서 회담 참여
1868년 외국 사무계 근무. 이때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 5개국 공사와 회견.
5월 효고현 지사
1869년 통상소보, 대장소보 등 주요 부서의 국장급 직위에 오름
1870년 이와쿠라 도모미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 등을시찰. 미국 대통령 예방.
1872년 특명전권부사로 미국 대통령과 회견, 빅토리아 영국 여왕 알현, 프랑스 대통령 만나 국서 봉정하는 등 유럽 각국 순방
1874년 내무경(내무부 장관)에 임명됨
1875년 법제국 장관에 임명됨
1877년 형법 초안 작성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 시찰. 독일 학자에게 헌법 강의도 듣는다
1885년 한일문제에 관해 대청국 담판의 특파전권대사로 청나라 방문, 청의 전권대신 리훙장과 톈진조약 체결. 12월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됨.
1889년 이토가 기초한 헌법의 반포 의식에 참여
1892년 제2차 이토내각 성립
1895년 청일전쟁 강화회담의 전권변리대신에 임명돼 청나라 전권대신 리훙장과 담판.
1898년 제3차 이토내각 성립
1900년 9월 보수정당 입헌정우회 창립. 제4차 이토내각 성립
1904년 총리로서 러일전쟁 개전 결정. 한국 특파대사로 한국 방문.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체결. 12월 초대통감으로 부임
1909년 6월 조선통감 사직.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 그의 장례는 히비야공양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짐.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죠슈번(藩)에서 하층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성은 하야시(林)였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일곱살 때 최하층 무사계급 출신인 이토가(家)에 양자로 들어가 성이 이토가 됐다. 집안이 곤궁해 지방관리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이토의 운명이 바뀌게 된 계기는 죠슈번 출신의 개화파 선구자 요시다 쇼인(古田松陰)이 세운 슈카 숀주쿠(松下村熟)에 입학한 것이었다.
미국의 군함 페리호 한대를 이겨내지 못했던 섬나라 일본을 세계 열강의 자리에 진입하게 했던 것은 근대화 혁명이라 할 메이지유신의 성공 때문이었다. 이 개혁의 주역은 죠슈번과 사쓰마번이었고 이토의 출신지인 죠슈번의 개혁파를 대대적으로 양성했던 곳이 바로 요시다 쇼인의 학교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메이지 시대의 주역들과 교우관계를 맺던 이토는 22세 되던 해 영국 공관을 습격해 불을 지르기도 하는 등 양이파(서양 반대파)에 서기도 했지만 그 직후 서양문물을 흡수하기 위해 막부 몰래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에서 신문물을 보고 놀란 이토는 이때부터 개화파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1868년 메이지유신에 소장 개혁세력으로 참여한 뒤 이토는 외국 사무를 담당하는 관직을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이때 이후 죽기 전까지 이토 히로부미는 40여년간 장관·총리·전권대사·정당 총재·추밀원 의장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일본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미국·영국·러시아·청나라와의 협상에 전권대사로 참여해 외교의 틀을 짜고, 일본헌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일본 현대사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는 메이지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일본헌법 기초하고 총리만 4번 지낸 거물

기자는 이토를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났다. 그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되기 불과 몇시간 전이었다. 불의의 일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좋아하는 브랜디 몇잔을 마시고 잠이 든 그를 꿈속에서 만난 것이다. 우리가 사진에서 봤듯, 두텁고 긴 검정 코트에 ‘실크 해트’(영국풍의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짚고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눈을 뜨고는 물었다.

“누구인가?”
“100년 뒤 한국에서 온 기자요.”
“음, 100년 뒤의 사람이 지금 앞에 있소? 허어,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군. 해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어찌됐든 같은 황국신민의 후예를 만나게 돼 반갑구만.”

이토가 외교권만 감리하기로 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차츰 치안·경제·교육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자주권을 박탈해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피살된 이듬해 이름뿐이던 한국은 일본에 공식적으로 합병당하게 된다. 초대 통감으로서 한국 병합을 주도한 그로서는 한국이 만년세세 일본의 식민지로 남았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는 거대제국인 러시아마저 물리치고 세계 3대 강국으로 떠올랐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니오. 일본은 30년 뒤 군부 강경파가 미국·영국·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다 패망하고, 한국은 이 전쟁이 끝난 후 독립했소.”

“어허, 지금도 강경파가 문제인데 30년 뒤에도 대외강경파가 또 일을 저질렀구만.”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인물이다. 이토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창했던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했다. 물론 한국 정복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고, 시기를 내정개혁 뒤로 미루자는 의견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이후 청일전쟁 뒤의 삼국협상, 러일전쟁 결정과정, 대한정책에서 대외 세력관계를 면밀히 계산한 뒤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처리를 해왔다.

― 당신이 한국인에게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는 것은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것 때문이오. 당신은 강제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것 아니오?
“무슨 말이오. 보호조약은 한국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체결한 것이오. 한국의 황제와 대신들이 이 조약 체결에 응한 것 아니오? 열강도 인정한 합법적 조약이었소.”

― 그러나 프랑스 국제법학자인 프랑시스 레이는 1906년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에서 ‘을사조약은 완전히 무효’라고 주장한 것을 보지 못했소? 한국정부측의 동의 표시가 없고 일본측이 한국에 확약했던 보장의무 위반이라는 두가지 하자 때문에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레이의 주장이었소.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의 서명은 이토와 하야시를 호위하는 일본 군대의 압력 때문이었을 뿐이며 대신회의에서는 이틀 동안 저항하다 체념하고 조약에 서명했지만 황제는 즉시 강대국인 미국의 워싱턴에 대표를 보내 강제성에 대해 맹렬히 이의를 제기했소. 한국 정부측이 자유로운 의사로 동의한 것이 아니고 전권대사에게 행사된 폭력 때문이며, 따라서 을사조약은 효력을 가질 수 없는 것 아니오?
한국의 후세인들은 일본 정부에 을사조약을 근거로 한 조선 지배가 국제법상 불법강점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를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소이다.
“…….”

이토는 현대사 연구자들의 조사가 바탕이 된 물증을 제시하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잠시의 침묵 뒤 그는 외교적 수사가 배제된 진심을 토로했다.
“러일전쟁 당시 나는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타국에 의한 한국의 제압은 일본의 안전보장을 결정적으로 위협한다고 생각했소.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가와 군부 모두의 생각이 그러했다고 보면 될 것이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우리는 러시아와 싸워 이겼소. 그러나 러시아를 물리쳤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소? 영국·미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호시탐탐 중국이며 조선을 노리는데…. 한국만은 우리의 세력권에 확실히 묶어 두어야 만세일계의 대일본 제국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오. 그리고 서구 열강이 식민지 국가를 병합하는 것이 법을 기초로 하는 것이오? 서로의 견제 속에서 잇속만 차리면 되는 것 아니오? 우리는 조약의 합법성보다 이권의 균등한 분할을 전제로 영국·미국과의 협약에 더 힘을 기울였소이다.”

― 이토. 당신 때문에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소. 따라서 당신을 죽여야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한국이 부강해질 수 있을 것이며, 그밖의 동양 각국의 평화 또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소. 그리고 이런 젊은이들이 한국에는 무수히 많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허, 내가 죽어야 동양평화가 이뤄진다? 물론 내가 외교무대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내 정적이기도 한 야마가타같은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내가 오히려 유약한 정책을 써서 문제라고 비판이 대단하오. 러일전쟁 전에는 개전을 늦게 한다는 이유로 나를 암살해야 한다는 강경파들도 있었고, 내 동상을 끌어내려 때려부순 자들도 있소. 그러나 나는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이미 3년전(1906년) 내 신상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처와 아들이 지낼 집과 함께 생활비까지 준비해 두었소. 이미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오.”

군부 강경파에 맞서 합리적 정책 고수

이토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오면서 실제 이런 유사시의 대비까지 했다. 유족에 대한 이런 대비를 했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어 일왕 메이지는 공작 집안의 체면이라도 유지하라며 30만엔을 보냈다고 한다. 한국인의 적이지만 이토가 일본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이런 청렴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이완용·송병준·민영휘·박영효 등 매국노 귀족들이 한일합방 뒤인 1911년의 조사에서 한국 30대 자산가의 반열에 들어 있었던 것을 보면 참담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 당신이 주도했던 한국 강점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는 절름발이 역사가 되고 말았소. 경제적 수탈로 숱한 국부가 유출되었고, 한국의 역사적 문화 유산도 파괴되었소. 한국 민중들은 가혹한 지배 속에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했고, 끝내는 강제 징병·징용에 정신대라는 세계 식민지사에서도 드문 제도적 강간까지 당해야 했소. 당신이 말한 동양평화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소?
“음……. 유감이오.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소. 그러나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던 제국의 시대에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소. 우리 일본제국 역시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군함에 의해 강제개국했고, 서구 열강에 불평등 조약을 강제당했소. 그러나 우리는 절치부심, 막부를 타도하고 입헌민주국가를 세워 나라를 현대화했소. 나 역시 서구의 발달한 문물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세차례나 해외 유학을 했소이다. 우리 일본제국은 서구 각국의 문물 중 최고의 것만 배워왔소. 해군은 영국, 육군은 프랑스, 헌법과 민법은 독일, 형법은 프랑스, 대학은 미국 것을 따라 했소.

한국은 정말 한심했소이다. 내가 통감으로 부임했을 당시 서울의 관립 소학교가 10개를 넘지 못했소. 1895년 갑오경장 때 소학교령을 반포하면서 설립했던 학교가 4개였으니 10년간 6개의 소학교를 만들어 놓은 것이오. 한국의 대신들에게 ‘한국이 지난 10년간 나라의 생존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꾸짖지 않을 수 없었소. 정부의 고관이나 왕이 해놓은 것이라고는 밤낮 서구 열강 중 어디에 붙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만 생각하니 나라 꼴이 한심하지 않소? 이런 정부를 우리가 ‘보호’해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처럼 한국의 지배층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대원군의 실정을 틈타 민비가 권력을 장악한 지 9년여 만에 국고는 완전히 거덜나 있었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벌써 5년 이상 봉급 구경을 하지 못했으며, 구식 군대의 병졸들은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낭비는 극심했다. 유명한 점쟁이 이유인은 점 한번 잘 쳐주고 그 자리에서 1만냥과 비단 100필을 받았다. 민비는 자신의 두살배기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리훙장(李鴻章)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치고 세자 책봉을 받아냈다. 세자 책봉을 받은 후에는 금강산 1만2,000봉의 봉우리마다 돈 1,000냥과 쌀 한섬, 베 한필씩을 바쳤다. 이런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을 개혁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학혁명을 비롯한 민중의 봉기는 끊이지 않았지만, 이런 아래로부터의 개혁 의지는 썩을 대로 썩은 지배층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원천봉쇄하지 않았던가.
이런 참담한 심경에 빠져 잠시 할말을 잃고 있는 사이 어느새 기차는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정부의 실력자인 재무부 장관 코코후초프가 차내로 들어와 이토를 영접하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난 뒤 러시아군과 청국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외교관들과 악수를 나눈 다음 환영 나온 일본인 거류민단 쪽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군중 속에서 뛰어나온 한명의 청년이 이토에게 권총 3발을 발사해 다 명중시켰다. 안중근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으면서도 이토는 누가 쏘았느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이토는 “바까나 야쓰!”(바보같은 놈)라고 중얼거렸다. 그 뒤 얼마 안돼 이토는 절명했다.
그해 11월4일 이토의 장례는 당시까지 있었던 국장 중 최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토의 관 옆에 서 있던 육군대장 노기는 “큰소리로 말할 수 없지만 실로 죽을 장소를 잘 얻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정치가인 오쿠마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다다미 위에서 죽느니 차라리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자객의 손에 죽는 것이 영예로웠다”고 말했다. 이런 군국적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이토의 죽음을 조속한 합방의 계기로 재빨리 이용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에도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거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와 친일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순종은 친히 통감부를 방문해 조문하고, 이토에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총리대신인 이완용은 사흘 동안 조의를 표하기 위해 서울 시내 일원에 일절 가무음곡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유림을 비롯한 13도의 대표를 자칭하는 자들이 이토 암살에 대해 죄를 청하는 사죄사를 파견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우리 역사의 또 하나의 치욕이었다.

우리 역사의 치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두권의 책
“이완용 평전”과 “이토 히로부미”

구한말 우리 역사의 가려진 진실 기록

기자는 이번 이토 히로부미를 인터뷰하기 위해 자료삼아 “이완용 평전”을 봤는데, 최근 본 책 가운데 이렇게 진지한 주제를 명쾌하게 다루면서도 보는 재미까지 주는 책은 없었다.
매국노로 지탄받는 인물에 대한 평전을 재미있다고 말하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책은 이완용이란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친일 앞잡이의 길을 가게 됐는지를 당시의 신문자료를 바탕으로 눈 앞에 훤히 드러나게 그려 읽는 맛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더 큰 재미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왜곡돼 있는가를 밝혀준다는 데 있다.
이완용이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독립협회의 위원장과 회장으로서 독립협회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 이끌었고, 굵고 힘있는 서체로 쓰여진 독립문의 현판이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또한 그는 학부대신으로서 우리 교육사에 획을 그을 의무교육제도를 기초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가? 저자는 이완용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적극적 친일행위를 한 이용익·송병준과 달리 ‘대세상 어쩔 수 없다’는 논리 아래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고 본다.
이 책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간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의 책임이 이른바 ‘을사오적’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종에게 있다는 것과 민비 시해의 주범은 명백히 대원군이라고 주장했다는 데 있다.
그간 망국의 왕으로서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써온 것으로 알려진 고종, 그리고 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연배우였던 윤석화씨가 ‘한국의 잔다르크’라고까지 했던 민비가 사실은 국권의 강화가 아닌 이씨 왕가와 민씨 척족의 이해에만 골몰해 대한제국 패망의 최고 책임자라는 이 책의 결론에 접하며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이완용 평전”을 펴낸 중심출판사에서 나왔다. “이완용 평전”의 저자인 윤덕한씨는 이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하다. 윤씨는 “이완용 평전”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이토 공(公)은 나의 스승’이라고까지 한 이토 히로부미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의 평전을 기획했는데, 국내 연구자 중 이토 평전을 쓸 수 있는 필자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차선책으로 1958년에 나온 나카무라 키쿠오의 “이등박문”을 번역해 출간했다는 것이 윤씨의 말이다. 이 책은 집필 시점도 오래됐으려니와 일본인 시각에서 쓴 평전이어서 국내 독자들에게 꼭 맞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등박문에 대한 책 한권 없는 실정에서는 한일관계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한번 읽어볼 만하다.
침략의 원흉이라며 국민적으로 적개심을 갖는 인물의 실체를 학문적 역량으로 기록해 놓지 않은 나라. 윤덕한씨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몇년전 ‘경제는 2류, 정치는 3류’라고 한 데 빗대, 우리 학문의 수준은 4류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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