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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경영자 진시황
 관리자  07-25 | VIEW : 2,554
위탁경영자 진시황

최용범 :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졸업. 전 “사회평론 길” 기자./현 더난출판사 기획팀장.
저서로 “대학문예운동의 이론과 실천”(좋은책刊, 공저), “너희가 대학을 아느냐”(새로운사람들刊, 공저)가 있다.

'그는 참으로 소중한 인물이었다.’일본의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그의 저서 “진의 시황제”(한국어판 제목은 “역사의 괴물 진시황”한국경제신문사 刊)의 말미를 이 한마디로 장식한다. 잔혹함의 상징인 ‘분서갱유’로 역사 속에 각인된 진시황에 대해 이런 찬사를 할 수 있을까? 물론 진순신은 그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기는 했다. 진시황이 최초로 진 제국을 건설한 이래 2,000년간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제정시대가 계속됐다. 그가 창립한 제정(帝政)의 모델이 긍정적 의미에서든, 반면교사로 작용했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중국을 넘어 한자문화권에 들었던 나라의 근본적 틀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역사적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흔적은 제정시대를 훌쩍 넘어 21세기 디지털시대에서도 감지된다.
빌 게이츠와 진시황 진시황 연보

BC 259년 당시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출생
BC 251년 진나라로 귀국
BC 246년 즉위, 여불위 섭정
BC 238년 여불위 파면(?) 친정 시작
BC 227년 형가의 진시황 암살 미수사건 발생
BC 221년 진이 제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 황제 등극. 도량형과 수레의 폭을 동일하게 규정. BC 218년 장량이 박랑사에서 시황제 습격
BC 213년 이사의 건의로 분서 단행
BC 212년 아방궁 조영 시작. 갱유 단행
BC 210년 시황제 순유중 사구(沙丘)에서 사망
BC 206년 진의 마지막 황제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하고 진 멸망

세계 소프트웨어업계의 황제 빌 게이츠와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공통점은? 답은 양자 공히 표준을 장악하는 데 엄청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제품을 서로 대체해도 되는 호환성이 어느 산업보다 중요한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누가 먼저 소비자들의 입맛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느냐에 승부가 달려 있다. 표준을 장악하는 것이 승부의 관건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글1.5’를 쓰기 시작한 한글소프프웨어 사용자는 뒤에 좀더 나은 ‘훈민정음’제품이 나오더라도 웬만해서는 ‘글97’을 쓰게 마련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1980년대초 사용자들이 MS DOS를 무단복제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소비자들이 MS DOS의 입맛에 길들여질 즈음에야 개정판을 내고 이때부터는 무단복제를 철저히 막는다. MS DOS에 입맛이 들린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개정판을 살 수밖에 없다. 다른 회사에서 더 좋은 제품이 나온다 하더라도 한번 길들여진 손맛은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빌 게이츠가 30대에 세계 최대의 부자로 성공한 비결이기도 하다.

진시황 역시 영토뿐만 아니라 통일마니아라고 할 정도로 표준을 설정하는 데 집착한 인물이다. 그는 영토를 통일한 뒤 곧바로 주(周)의 봉건영주제를 버리고, 전국을 36개군으로 분할 통치하는 군현제를 시행했다. 최초의 중앙집권제인 것이다. 진시황의 군현제는 1911년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2,100년간 존속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에 기반해 도량형·달력·문자·법제를 통일했다. 뿐만 아니다. 차 바퀴의 폭까지 일률적으로 정하게끔 명령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도로는 바퀴 자국이 깊숙이 나서 마치 기차의 궤도처럼 되어 있었다. 차는 바퀴를 그 자국에 들여놓고 달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7개국이 서로 물고 물어뜯는 전란의 시대에 각국은 다른 나라의 차가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다르게 해놓은 것이다. 진시황은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바퀴폭까지 통일시켜 교통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확충시킨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의 이런 다각적인 통일정책에 힘입어 진나라 이후 중국은 18세기까지 세계 역사 속에서도 최선진국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진시황의 이런 업적 때문인지 오늘날 중국의 영문표기인 China 역시 ‘진’(秦)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듯 중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으면서도 진시황은 한(漢) 이래 분서갱유로 상징되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격파탄자로 묘사돼왔다. 그러나 최근 진시황릉의 발굴을 계기로 그를 난세의 위대한 리더이자 역사의 건설자로 조명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필자는 역사자료를 엔진으로, 상상력을 연료로 한 타임머신을 타고 진시황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억울하기 그지없을 역사의 평가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있었을 비사(秘事)들을 그의 육성으로 들어본다.

우선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진 제국을 성립시킨 진시황이 하늘에 제사(봉선)를 지내는 태산으로 찾아가 황제 취임 인터뷰를 요청했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그이기에 인터뷰가 쉽게 성사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였다. 환관 조고에게 인터뷰 요청 의사를 들은 진시황은 예정된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회견할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왔다. 의외의 선선한 수락에 잠시 의아했지만 얼마 안가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진시황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이다. 그것도 황제인 자기와 동등한 대우를 해주면서 말이다. 그의 이런 면모 때문에 그는 대량 사람 울료에게 오히려 최악을 평을 들은 일까지 있다.

태산에서 만난 진시황

진시황이 제후국 진(秦)의 왕이었던 초기의 정책은 대부분 울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가 계책을 제시하자 진시황은 그 재능을 눈여겨봐 울료를 조정에 자주 불러 자신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저 자랑으로 여겼겠지만, 울료는 이를 통해 진시황의 됨됨이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이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몸을 숨겼다고 한다.
“나는 관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왕은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겸손해하며 자신을 낮추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은 궁하면 쉬이 남에게 굽신거리고, 뜻을 얻고 나면 남을 업신여길 사람이다. 정말 진시황이 천하를 얻게 된다면 만인이 모두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 함께 오래 사귀지 못할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시황이 인터뷰를 통해 얻을 것은 무엇인가. 눈치 빠른 독자들은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진시황의 영생 욕구. 그 의심 많은 진시황이 희대의 사기꾼 서복에게 동남동녀 3,000명과 수많은 재물을 사취당하는 대형사기를 당했던 것은 그의 불로장생 욕구 때문 아닌가.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로초가 그의 육체적 영생을 추구했던 것이라면,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진시황릉은 지상에 그의 자취를 남겨놓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업적을 2,000년 뒤의 인간에게 알리고, 잔혹한 폭군으로만 알려진 그의 오명을 자신의 육성으로 해명하는 것, 이름을 닦아 세상에 널리 오래 알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유한함을 넘어서는 인간의 길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진시황은 인터뷰를 통해 영생 욕구를 얼마간이라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천자가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봉선 의식은 태산의 정상에 단을 쌓아놓고 지냈다. “사기”에 의하면 봉선은 제왕이라고 해서 아무나 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천하를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온 천자만이 봉선의 자격이 있다. 그래서 동주(東周) 시대 패자한테 신세를 졌던 천자들은 누구도 봉선 의식을 거행하지 못했다. 진시황이 지내는 이번 봉선 의식은 그래서 550년만에 처음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 봉선을 위해 차가 태산 꼭대기까지 오를 있는 도로가 뚫렸다.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제사를 천단 근처 나무 밑에서 지켜보면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천하를 통일해 새시대를 열었다는 진시황의 긍지와 기백을 적었다는 석비를 세우는 것을 끝으로 봉선 의식이 끝나고, 얼마 뒤 환관 한 사람이 황제의 임시 처소로 필자를 안내했다.
천단 아래 마련된 임시 처소에서 진시황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필자를 맞았다. 앞에 등장했던 울료는 진시황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진시황의 사람됨이 코가 높고 눈이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독수리와 같고 목소리는 살쾡이와 같았다.’
울료가 이렇게 평한 것은 진시황이 20대 중반, 여불위를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다질 무렵이었다. 황제는 그의 아버지 자초(장양왕)가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시기에 그 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진나라로 탈출할 때는 같이 가지 못하고 조나라에서 2년간 숨어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부터 지명수배자로 지낸 것이다. 이런 성장 배경과 함께 13세에 왕위에 올라서도 10년을 섭정자인 어머니의 정부(情夫) 여불위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왕위에 오른 지 10년만에야 비로소 세력기반을 확고히 다져 여불위를 숙청하고 본격적으로 국가경영에 나선 20대의 나이였으니 여유가 없고 날카로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 필자 앞의 앉아 있는 40대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에 자리에 오른 만큼 위엄과 여유로움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왔다.

“이곳까지 오는 데 힘들지 않았소?”
― 중국 사람들이 높은 산으로 태산(해발 1,450m)을 자주 말해 무척 높은 산인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우리나라의 북한산 만하군요.
“우리 중화가 태산을 최고의 산이라고 하는 것은 높기 때문이 아니라 성스러운 기운이 서린 성산이기 때문입니다. 주 왕실도 이곳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지요. 태사께서는(기자의 의미를 진나라 때는 태사라고 칭했다) 조선에서 오셨다고요?”
― 예, 중국하고 조선이야 이웃이기도 하고 오랜 역사를 함께 이뤄오기도 했지만 폐하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 폐하께서 얼마 전에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서복이란 사람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 서복이란 사람이 사실 간 큰 사기꾼인데, 우리 조선땅에 상륙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해 금산에 상륙해 그곳에 있는 부소산에도 올라간 흔적이 보이지요. 그리고 그 불로초란 것이 조선에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인삼이지요.
“하하하, 그래요? 조선을 조금만 빨리 알았어도 참 좋았을 걸 그랬네요.”

진시황과 부르주아지

“巨商의 자금지원이 천하통일의 에너지源”

일본의 중국계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진시황의 통일을 촉진시킨 에너지의 하나로 강해진 상인의 힘을 들었다. 전쟁이 거듭되는 세상은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거상들의 활동에 장애가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진시황의 주된 업적인 도로·문자·도량형의 통일, 즉 상거래 인프라의 혁신적 구축은 상인들의 이득을 2~3배 높여주었다.
일본 고베대학의 하야시다 신노스케 교수 역시 “거상 출신인 여불위의 피를 이어받은 시황제는 국가경제를 전망할 줄 아는 날카로운 지력과 신흥 부르주아지의 자유롭고 활달한 패기를 지니고 있었다”면서 “난세에 질린 당시의 부르주아지들이 천하통일을 기대하며 일제히 자금을 대주었고, 결국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분석을 내린 바 있다.
진나라가 취했던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법가사상에 대해서도 현대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옛 귀족세력의 이해를 대변한 이데올로기집단으로서의 유가에 대비되는 사상이라고 분석한다. 법가는 새롭게 발전하던 상인계층과 진취적인 관료의 사상을 대변했다는 것이다.
“사기”도 진시황의 상인들에 대한 남다른 대접을 기록하고 있다. 변방의 비천한 목장주였던 나( )가 골짜기 여럿을 가축으로 채워 엄청난 부를 쌓자, 그를 그 지방의 군(君)으로 봉했다는 것이 그 하나다. 그 외에도 청(淸)이라는 외딴 시골의 과부가 조상때부터 발견해 소유하던 금광을 잘 관리해 큰 부를 이루자 그를 손님으로 대우해 주고 여회청대(女懷淸臺)라는 기념 건축물까지 세워주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진시황이 상인층의 지지를 받고 이에 기반해 통일을 이뤘다 해서 이들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옹호했던 것은 아니다. 상인들의 독과점에 대해서만큼은 가혹할 정도로 다스렸다. 진 제국이 성립될 무렵의 큰 부자는 소금과 쇠를 독점해 떼돈을 번 자들이었다. 시황제는 혹리라고 불리는 담당관을 붙여놓고 매점매석의 불로소득원을 차단하는 시정방침을 무자비하게 밀고나갔다.

1만3천 궁녀는 전리품일 뿐이다

진시황은 대단한 정력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루 1석(30㎏)의 서류에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을 정도로 일벌레였고, 통일 후에는 지방순회 시찰이라 할 순수(巡狩)를 10년간 다섯차례나 다녀왔다. 교통편이 말뿐이었던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일이었다. 거느린 후궁만 1만3,000명이었다.

― 업무가 무척 과중하실 텐데, 특별히 드시는 보양식이 있습니까?
“특별한 것은 없고, 밤죽을 즐겨 먹습니다.”
황제의 영양식치고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죽이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밤에는 특수단백질이 풍부하고 인체에 흡수도 잘 돼 정력을 소모한 후 즉시 회복하는 묘약으로 여긴다고 한다.
― 영웅은 호색이라고들 합니다. 은 주왕의 달기, 주 유왕의 포사, 오왕 부차의 서시, 그리고 폐하의 후대이지만 당 태종의 양귀비 등이 숱한 최고권력자들의 사랑을 받은 여인들로 유명합니다. 동서 800m, 남북 150m에 이르는 아방궁에 1만3,000명이 넘는 궁녀을 두셨는데, 누구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베푸십니까?
“글쎄요 크게 생각나는 여인은 없군요. 후세 사람들은 내가 아방궁을 조영한 것이라든가 1만명을 훨씬 넘게 궁녀를 둔 것을 두고 사치스럽다느니 호색한이라느니 하는데, 이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진은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 중국을 열었습니다. 통일된 나라의 궁궐은 상징적 의미에서라도 이전의 제후국들보다 훨씬 규모가 커야 합니다. 그것도 가장 강대한 7개국 통일이니 대국의 규모에 맞는 대형 궁궐을 조성했습니다. 시녀들은 새로 뽑은 것이 아니라 6개 나라의 궁녀들을 전리품 격으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멸망시킨 나라의 궁녀는 나라의 재산입니다. 나는 단언하건대, 평생 주지육림에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 사실 페하에 대해서는 사가들의 평가가 분분합니다. 주지육림의 사치를 누리면서 잔혹한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보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마오쩌둥(毛澤東) 같은 이는 폐하를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4명의 황제 중의 한 사람으로까지 꼽고 있습니다. 시대를 개혁한 진보적 군주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이런 시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페하의 분서갱유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잘못됐다고 봅니다. 숱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 점은 폐하의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극약처방을 내려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까?
“분서는 좌승상인 이사의 진언을 받아 시행한 것입니다. 6국을 병합한 마당이니 각처에서 반란의 기운이 있고, 황실을 비방하는 소리도 높았습니다. 비방하는 소리는 주로 유가들에게서 나왔는데, 뚜렷하게 무엇이 문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어땠는데’ ‘시경·서경에는 이렇게 씌여 있는데’ 하는 식이어서 백성들의 민심만 어지럽힐 뿐입니다. 유가들이 얼마나 세상 일에 눈이 어두운지는 이번 봉선 의식을 하면서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의식 절차는 저희들이 가장 잘 알고, 중시한다면서도 봉선 의식의 절차를 놓고 유생들끼리도 의견통일을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떠들 뿐이었습니다. 성산인 태산의 초목이 다치지 않도록 차 바퀴를 거적으로 싸야 한다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주었다가는 아예 봉선 의식을 치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농업·의학·천문 등에 관련된 책들만 남기고 ‘시경’ ‘서경’ 등의 책들은 다 불태울 것을 명했습니다. 물론 민가에서만 보지 못하도록 했지 황실 보존용으로 쓸 책들은 남겨두었습니다.”

― 책도 책이지만, 선비들을 생매장한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선비들이라, 나는 선비들을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방사(方士·영생술이나 점괘 등을 연구하는 사람)의 무리들을 묻은 것입니다. 술수(術數)를 부려 불로장생하는 선약을 구해 바치겠다는 노생·후생 같은 방사들이 약은 구하지도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면서 이들이 배은망덕하게 나를 비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 무리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백성들 사이에 요사스런 말들이 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시황의 이런 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을 통일하고 한창 제국의 기틀을 다져나가려는 의욕에 가득찬 진시황으로서는 건설의 전제조건인 사상의 통일을 열망했을 것이라고. 1998년 번역 출간된 위에난(000)의 “진시황릉”에서도 분서갱유는 이사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진시황에게 과장되게 보고를 올린 때문임을 상기시키면서 이 사건에 대한 진시황의 오명을 벗기기 위한 변론을 편다. 위에난에 의하면 분서갱유는 ‘법가를 대표로 하는 진나라의 문화가 유가를 대표로 하는 관동문화를 파괴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기는 이런 시각이라면 더욱 철저한 분서, 즉 사상탄압은 한(漢) 이후 유가가 지배층의 학문과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택하면서 관변유학은 집중육성되고 그 이외의 사상조류는 정책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한대(漢代) 이후 법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는 이단시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구체적 경위야 어찌됐든 진시황은 ‘분서갱유’로 인해 학문과 사상의 탄압자로 낙인찍혀 있다. 이런 그가 좋아하는 책이나 사상가가 있었을까?

― 폐하께서 감명깊게 읽었거나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이 있습니까?
“나는 왕이 되면서 자나깨나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강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 방법을 얻기 위해 책도 열심히 찾아 읽었습니다. 그 중 내가 친정(親政)을 시작할 때쯤 읽었던 ‘한비자’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 책을 읽고는 ‘정말 이 사람을 만나 함께 놀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고 혼잣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한비자를 우리 진나라로 데려오기 위해 나는 한나라로 급히 군대를 출병시켰습니다. 내가 한비자를 욕심내는 것을 한나라도 알고 있었죠.”

― 한비자의 사상 어디에 가장 공감이 갔습니까?
“그의 저술 곳곳에 있는 생각 모두가 나의 생각과 꼭 한가지인 것처럼 맞았습니다. 특히 요(堯)와 순(舜)을 읊조리며 선왕의 덕이나 예찬하는 유가와 달리 철저히 현실을 중시하는 태도나, 정(情)을 배격하고 엄정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주창하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침공해 들어오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인(仁)이나 예(禮)를 따지는 유가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이 전란의 시대를 끝내는 것은 천하를 하나로 묶어세울 힘이었지, 군주들의 도덕심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가의 듣기 좋은 이상주의는 백성의 생활을 구하는 데 필요한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시황이 이렇듯 공감하던 한비자가 진나라에 화평사절로 오자 진시황은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한비자 역시 자신을 인정해주는 진시황에게 흔쾌히 약속했다. 그러나 한비자는 뜻을 채 펴보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죽는다. 순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이사의 배신 때문이었다. 이미 진시황 수하에 있던 이사는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한비자가 등용되면 입지가 축소될까 두려워 간교한 술책을 부린 것이다. 그는 진시황에게 한비자가 한나라의 귀족이므로 진의 관직을 맡는다 해도 한나라의 국익을 우선으로 생각할 것이므로 장래에 우환이 될 것이라고 참소했다. 시황제도 이를 옳다고 여겨 일단 하옥시켜 법을 연구하게 했다. 그러고도 재능이 아까워 사면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한비자는 이사가 보낸 독약을 먹고 자살한 뒤였다. 이사 역시 진나라의 정책 전반을 수립한 공신이지만 이런 일들 때문에 역사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역사는 한비자의 이런 불행과는 관계없이 흘러갔다. 무고하게 한비자를 죽인 이사의 보좌를 받아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기. 나라간의 전쟁이 이어져 국력은 소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피곤하기만 했던 시대. 시황제는 시대적 요청이라 할 새로운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기능적인 관료들의 역할을 극대화시켜 절대왕권을 수립하는 것, 거추장스런 법도와 예식을 없애고 과학기술과 상공업을 장려하는 것 등. 시황제는 자신의 선왕들이 3대에 걸쳐 수립해 놓은 진나라의 진취적 기풍을 한데 모아 마침내 전국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는 200년 전 맹자의 예언을 비웃듯 6국을 철저히 괴멸시키면서 말이다. 이런 초유의 업적을 달성한 진시황의 감상은 어떠했을까?

“이제 모든 전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통일 이후로는 전쟁을 잊기 위해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전부 거둬들였습니다. 그것을 녹여 종거(鐘 ·종을 거는 대)와 30t짜리 금인(金人·구리로 만든 인형) 12체를 만들어 궁 안에 세웠습니다. 나라 안의 차가 다닐 수 있게 사통팔달의 도로를 내고, 밖의 오랑캐를 대비하는 만리장성만 쌓으면 됩니다. 우리 진은 이제 만세토록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 후손들이 내 이름을 그대로 써서 자손만대가 진시황 2세, 3세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시황제의 천하를 통일했다는 이런 긍지와 기백이 서린 말이 끝나자 어느새 환관 조고가 오더니 행차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친 진시황의 얼굴에는 후련한 표정과 함께 뭔가 허전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대업을 이루고 제국의 기초를 어느 정도는 닦아놓아 이제는 더 이상 새롭게 강렬한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일까? 진시황은 이 천단에서 제사를 지낸 이후 다른 사람처럼 변모했다. 건설의 파토스가 사라진 뒤에는 신중한 판단력이 결여된 무모한 결단력만 남았다.
백성들은 쉴 틈이 없었다. 노동으로, 한줌 여유도 없는 극단적인 법치로 백성들은 전쟁 때만큼의 피로를 느껴야 했다. 진시황은 다섯번째 지방순수를 행하던 중 4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그 4년 뒤 진은 자멸하다시피 멸망했다.
결국 중국 역사는 천하 통일과 5,000년 역사의 기틀 확보라는 역사적 과제를 그에게 맡겼나보다. 그는 중국 역사의 위탁경영자였다.

秦제국 멸망이 주는 교훈

“환관 조고의 정보 독점과 왜곡이 주 원인”

중국의 역사학자 중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이들은 진의 멸망을 진시황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 그리고 지나친 노역과 병역 때문에 생긴 백성들의 반발만으로 보는 것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하윤곤 같은 학자는 “진나라가 망한 근본원인은 호해가 왕위를 찬탈한 뒤 모든 것을 도리에 역행해 끌고가, 진나라 통치집단의 모순·분열을 조성함으로써 통치역량을 나약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근본적인 역사의 흐름을 논외로 한다면 진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환관 조고의 전횡과 이에 휘둘린 2세 호해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치밀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던 진시황이 왜 2세체제를 준비하지 못했던 것일까? 역사가 기록하듯 이는 2인자였던 환관 조고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정보채널 독점과 이를 이용한 정보 왜곡에 있었다.

▲ 정보채널의 제한 ― 진시황은 봉선 의식을 끝낸 뒤 스스로 신선이 되기를 원했다. 신선이 되는 방법을 묻자 주변의 방사(方士·도사)들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들어와 신기(神氣)에 해가 된다며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라고 권했다. 진시황은 이를 따랐다. 당연히 그의 거처를 아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정보채널은 환관 조고와 재상 이사를 비롯한 수명에 그쳤을 뿐이었다. 진시황이 죽음을 맞을 당시 그의 죽음을 아는 자는 환관 조고와 재상 이사, 그리고 어리석은 막내아들 호해 뿐이었다. 당연히 최고권력자가 접수할 정보채널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 정보의 왜곡 ― 당시 진시황은 후계자로 장남인 부소를 지명하는 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조고는 유서를 왜곡해 장남 부소와 명장인 몽염에게 자살을 명하는 가짜 조서를 보내고 이를 받은 두사람은 이를 어기지 않고 자살해 어리석은 호해가 제위에 오르고, 조고가 실권을 잡게 된다. 그 이후는 거대 제국의 급속한 몰락.
정보채널의 독점에 이은 왜곡. 굳이 제정시대가 아니더라도 정보가 물처럼 흐르지 않는다면 기업이든, 권력기관이든 조직의 마비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몰락 직전의 한글과컴퓨터 사장에 취임, 회사를 기사회생시킨 전하진 사장의 첫번째 조직 개혁이 정보 공유에 있었던 점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사내 계층간 정보 교류가 막혀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정보 공유를 선언, 사장과 말단직원이 갖고 있는 정보량의 차이를 없애버리는 정보유통의 개혁을 실현해 전직원의 시너지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쳤던 선발업체 39홈쇼핑과 후발업체 LG홈쇼핑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LG홈쇼핑 최영재 사장. 그의 승리 비결은 철저한 고객만족정책. 전자상거래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최종소비자의 만족도다. 최영재 사장은 월 110만부에 이르는 카탈로그 책자에 사장실 직통 팩스번호를 적어놓고, 이 팩스만은 비서들도 손대지 못하도록 하고 직접 챙기고 있다. 이를 통해 최종소비자의 불만을 직접 체크하는 것이다. 당연히 직원들은 최종소비자가 사장이고, 제일 무서운 것이다. 고객만족도에 대한 최고경영자의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는 직접확인이 다윗의 승리를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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