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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권력자의 ‘母情의 세월’
 관리자  07-25 | VIEW : 2,236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
물이 불어 못 오시나,
어느 권력자의 ‘母情의 세월’

서울대 朴漢濟 교수의 중국 中世로의 시간여행 ⑨

北朝版 離散家族 閻姬(北齊)와 宇文護(北周) 母子에 얽힌 사연

요즈음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로 들떠 있다. 이산 50년. 인간이 오래 살아도 100살을 넘기기 쉽지 않다는데 하늘이 이산가족들에게 부여한 시간은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다. 1,400여년 전 중국에서 일어난 어느 권력자의 이산 이야기가 못내 잊혀지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산가족이 수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통곡을 기록한 전적은 찾을 수 없다.

이산이란 寡頭 몇 사람의 권력욕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지속된다. 그들의 권력욕에 비하면 億兆 민중의 존재는 보잘것 없는 존재일 따름이다. 그들이 항상 내거는 거창한 이념이나 민중을 위한다는 지상의 명분도 한낱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동서 공통된 현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1,000만 이산가족이 있다. 그에 비해 재상봉의 기회를 얻은 사람의 수를 생각할라치면 그들이 만들어 둘러씌운 이산의 조처만큼이나 잔인하다. 대표적인 이산가족 집거지인 束草의 아바이마을, 그리고 豊基의 어느 이산마을 사람들의 낙담어린 한숨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병아리 눈물보다 더 작은 아량에 우리 민초들은 그저 감동해 마지않고, 언론마저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과두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宇文護는 北周 時代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자였다. 그가 적국 北齊에 있는 어머니와 상봉하기 위해 들인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가 읊은 35년간의 사모곡은 송환협상 과정에서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그가 당시 民草들의 離散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가 이산한 어머니에 대한 인간다움을 민초에게도 베풀었는지 모른다. 국가도 권력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권력을 향한 경쟁이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잃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이산문제의 접근도 인도적인 데 기반해야지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관계에 기반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출세한 사람들의 부모 송환, 친척 상봉이라는 것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의 친인척일수록 그만큼 이용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그 협상과정은 더욱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거나 혹은 국가경영상 꼭 필요로 하는 인사를 얻기 위해 부모 등 가족을 인질로 협상에 나서는 일이 중국 역사에서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송환이나 상봉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 두 토막을 여기서 소개해 보자.

한나라 창업주 유방(劉邦)과 그의 숙적 항우(項羽)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양자 사이에 숨막히게 진행되던 전쟁중에 유방은 팽성(彭城)의 전투에서 그의 아버지와 부인 여후(呂后)가 항우에게 사로잡히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후 광무(廣武)의 전투에서 유방군과 대치해 그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항우는 유방에게 지금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아비 태공(太公)을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유방의 대처방안은 간단했다. “우리는 초(楚) 회왕(懷王)으로부터 형제의 의를 맺으라는 명을 받은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나의 아버지는 곧 그대의 아버지다. 만약 아버지를 삶아 죽인다면 그 국 한그릇 나누어 주면 고맙겠다”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항우는 격노하여 태공을 죽이려 했으나 항백(項伯)이 “천하를 차지하려는 자는 집안일 따위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태공을 죽여봤자 아무 이익도 없고 다만 골치아픈 일만 더 생길 뿐입니다”하고 말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같은 유방식 대처방안은 일반 범인으로는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리라.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와 모사(謀士) 서서(徐庶) 사이에 생긴 이야기는 유방과는 상반된 내용이다. 서서는 원래 제갈량(諸葛亮)의 친구이고, 유비(劉備)에게 귀의하였다. 관도(官渡)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가 부하 장수인 여광(呂曠)·여상(如翔)·조인(曹仁) 등을 보내어 유비를 치게 하니 서서가 선봉에 서서 그들을 격파하고 요충인 번성(樊城)을 공격하여 빼앗는다. 조조는 서서가 모사로서 능력이 빼어남을 알고 유비로부터 그를 빼내기 위해 정욱(程昱)이 제시한 계략을 펼친다. 당시 영내에 살고 있던 서서의 모친을 허창(許昌)으로 잡아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필적을 흉내낸 편지를 보내어 서서로 하여금 항복하게 한 것이다. 서서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마지못해 유비의 곁을 떠나면서 제갈량을 추천한 것이다. 제갈량과 같은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최고의 초빙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서서의 충고였다. 이로써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만고의 가화(佳話)가 성립된 것이다. 서서가 허창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만나니 모친은 “거짓 편지에 눈이 멀어 전후 생각도 하지 않고 현명한 군주를 버리다니…”라고 꾸짖고는 자살해 버린다. 서서는 이 일로 인해 몸은 조조의 진영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유비에게 있어 종신토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어떤 계략도 조조에게 바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필자가 두 삽화를 굳이 소개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적대세력 사이에서의 인간의 정의에 입각한 소위 인도적 협상 혹은 그에 기반한 대응은 당초 국가라고 하는 거대조직에는 한낱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자가 전공하는 시대의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 보려 한다.

북조(北朝)시대 가운데 가장 마지막 왕조인 북주(北周:556∼581)의 실질적 창업자인 우문태(宇文泰)의 조카(우문태의 형인 宇文顥의 아들) 우문호(宇文護)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다. 그는 한때 북주 정국에서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자였다. 정치적 대전환기에 살았던 조조가 그랬듯 우문태도 20여년간 새로운 우문씨 왕조(北周)를 창업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중 그 결실을 눈 앞에 둔 시점인 서위(西魏 535∼556) 공제(恭帝) 3년(556) 10월 북방 전선을 순시하다 52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그는 셋째아들인 15세의 우문각(宇文覺)을 후사로 지정한다. 그리고 친조카인 동시에 우문씨 집안의 최연장자인 우문호에게 “나의 여러 아이들이 모두 어리고 밖으로 적들이 아주 강하니 천하의 일은 네가 맡아 힘을 다해 나의 유업을 이루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우문호는 숙부 우문태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지 두달 후 서위의 공제로 하여금 조카 우문각에게 황제위를 선위하게 하여 북주 왕조를 개창하게 한다. 주지하듯 서위 시기는 우문태를 비롯한 여러 명의 유력한 장군들이 자기 위주로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기 위하여 각자 치열하게 경쟁하던 기간이었다.
당시 우문태는 그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의 사후 정국이 반드시 우문씨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우문호는 우문태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먼저 수도 장안(長安)을 확보한다. 서위의 궁정 금위군을 장악함으로써 분산된 군사권을 우문씨 아래로 회수,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후 원훈대신(元勳大臣)과 유력장군들을 거세하는 등 북주 창업의 기초를 닦는 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이런 공로와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그는 북주 초 실질직인 최고권력자로서 16년간이나 군림했다. 통치기간 동안 북주를 실질적으로 창업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카인 우문각(孝閔帝:r.556∼557)·우문육(宇文毓:孝明帝 r.557∼560) 등 북주의 황제들도 임의로 폐살하였으니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문호는 북조판 대표적 이산가족이었다. 이상과 같은 정치적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전(“周書” 卷 11 晉蕩公護傳)은 반이나 되는 분량(12쪽 중 6쪽)을 그가 그의 어머니와 그리고 북제 정부와 나눈 세통의 편지가 차지하고 있다. 필자가 이 우문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자간에 나눈 편지의 내용이 이산의 아픔을 너무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문호의 열전은 역사기록이라기보다 그의 통곡소리가 배여 있는 한편의 사모곡(思母曲)이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기록하느냐는 사가(史家)의 고유 관할 부분이지만, 이 열전을 편찬한 역사가의 눈에 무엇보다 강하게 다가온 것은 우문호의 그 화려하고 거대한 정치적 족적이 아니었다. 바로 30여년간을 적국에 살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식으로서의 마음가짐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우문호가 그랬듯 정치판에서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철혈인간도 어머니 앞에서는 착하기 그지없는 동치(童稚)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우문호와 그 어머니인 염씨(閻氏:통상 ‘閻姬’라고 함)가 황하(黃河) 중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딴 나라에 나뉘어 사는 이산가족이 된 것은 북위 효문제(孝文帝:r.471∼499)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소위 한화(漢化)정책을 실시한 데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인 ‘육진(六鎭)의 난’의 결과였다. 이것은 북위의 주체세력인 탁발족이 중심이 된 선비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북위 시대 선비인들은 대대로 그들이 새내(塞內)로 들어온 이후 초원지역의 패자가 된 유연(柔然) 등 북방 유목민족 방어를 담당해왔다. 그들이 주둔하는 지역은 음산산맥(陰山山脈) 남북에 걸친 방어기지인 옥야진(沃野鎭)·회삭진(懷朔鎭)·무천진(武川鎭)·무명진(撫冥鎭)·유현진(柔玄鎭)·회황진(懷荒鎭) 등 6개의 진이었다. 효문제의 낙양 천도는 이제껏 북방 방어 위주의 정책에서 남진(南進)을 통한 중국 통일로 그 정책의 방향을 변경한 것이었다. 육진의 병사(鎭人)들은 직업으로는 군인, 계급적으로는 귀족, 종족적으로는 선비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낙양 천도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다른 것은 변하지 않았으나 사회계급만은 떨어져 천민화되었다. 250년 전 북위를 창업한 영광된 전사들이 노예나 다름없는 계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흐름에 반발한 진인들은 낙양의 조정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24년 옥야진에서 시작된 반란은 북진지대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이 난민 가운데 세계제국인 수·당(隋唐)왕조의 창업자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끼여 있었다. 그래서 수나라와 당나라를 창업한 사람들을 육진의 하나인 ‘무천진(武川鎭:현재 내몽고자치주 呼和浩特 북방 43㎞)집단’의 후예라 하는 것이다. 우문태의 아버지 우문굉(宇文肱)은 당시 하발씨(賀拔氏) 등과 함께 난민이었다.
육진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후 아사 상태에 빠진 육진의 민중들은 반란측에 가담했든 안했든 먹이를 얻기 위해 중국 내지, 즉 산서(山西)·하북(河北)지역으로 유동을 시작하였다. 북위 관군에 항복해 비호를 구하는 진민의 수는 20만인에 미쳤다. 조정은 이들을 하북 중부 기(冀)·정(定)·영(瀛)주 등 3주에 분산시켜 취식하도록 하였다. 우문씨는 정주에 배속되었던 항호(降戶)였다. 이 하북의 항호에서 반란의 불씨가 재연되었다. 내란의 불씨의 하나는 오원(五原)의 항호 선우수례(鮮于修禮) 등이 정주의 좌인성(左人城:河北 唐縣 西北)에서 거병한 것이었다. 이때 우문굉은 선우수례의 무장으로 활약하면서 관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곧 선우수례의 부하 갈영(葛榮)이 다시 반란세력의 지도자가 되어 상곡(上谷)에서 봉기했던 유현진민 두락주(杜洛周) 세력을 병합해 하북 일대를 제압하는 형세가 된다. 갈영은 우문굉의 제3자 우문락생(洛生)에게 어양왕(漁陽王)의 왕위를 주어 아버지가 이끌던 군대를 다시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 동생 우문태도 이때 장수로 임명되었다. 우문태 등은 갈영(葛榮)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탈출을 도모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갈영이 또다른 군벌로서 북위 왕조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계기를 마련한 이주영(爾朱榮)에게 패하였다. 갈영 밑에 있던 방대한 수의 북방진민들은 그대로 이주영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주영의 본거지는 진양(晉陽:現 山西省 太原)이었으므로 우문태 등도 진양으로 옮겨졌다. 이때 나중에 북주를 세우는 데 일익을 담당한 독고신(獨孤信) ·조귀(趙貴)·하란(賀蘭)·울지(尉遲)씨 등도 우문씨의 비호 하에 이주씨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들이 모두 무천진 출신이다. 육진의 난 이래 제 북방세력은 이주씨에 의해 통일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무천진을 출발한 각 가(家)는 다양한 경로를 거쳐 진양의 이주씨 밑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진양에 합류했던 그들은 곧 군사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 무천진 출신의 대표였던 하발악(賀拔岳)이 이주영의 조카 이주천광(爾朱天光)의 부장(部長)으로 관롱지방(關豌地方), 즉 현재의 감숙(甘肅) 남부와 섬서(陝西)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부임했다. 무천진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종군했다. 종군자들의 처자식들은 거의 진양에 남았다. 이 관롱지역 반란 토벌에 참가한 것이 곧 무천진 군벌 형성의 기원이 된 것이지만, 토벌군 참가 여부가 나중에 각 가의 운명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곧 화북은 동위(534∼550)와 서위라는 두 정권으로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군자의 남은 가족들은 곧 북제의 영역 내에 억류되고 말았다. 이때 우문호의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그의 아내 등 일가친척들이 고스란히 진양에 남게 되었다.
한편 북제 정권의 사실상 창업자였던 고환(高歡)은 하북성 발해(渤海) 수인(蓚人)의 한인(漢人)으로 되어 있지만 그 역시 육진의 하나인 회삭진에 살던 선비족 출신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고환은 동지들과 함께 처음 두락주, 다시 갈영에게 의탁했다가 결국 이주씨 밑으로 들어갔다. 고환이 투신할 즈음 이주씨는 북위 정국의 본무대에 등장하고 있었다.

東·西魏 양분후 宇文護 일가 北齊에 억류

이주영이 북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여러 지방의 토벌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환은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급속하게 두각을 나타낸다. 이주영의 후계자 이주조(爾朱兆)로부터 걸출한 인물로 인정받아 진주자사(晉州刺史)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고환에게는 호랑이를 들판에 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528년 이주영이 당시 북위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호태후(胡太后)와 그 이하 조정 대신 2,000인을 낙양 망산(邙山) 너머 황하변인 하음에서 학살한다. 이것을 ‘하음지변’(河陰之變)이라 한다. 이주영은 효장제(孝莊帝;r.528∼530)를 황제로 추대하지만 그마저 시해(弑害)해 버린다. 효장제(孝莊帝)도 북위 조정에 저지른 이주씨의 행위에 복수하기 위한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이때 고환은 황제를 탈취해 그를 끼고 자립하려 했으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고환이 관동의 패자가 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은 갈영의 여중(餘衆) 20여만인을 장악하게 된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주씨 밑으로 들어왔으나 그 대접에 불만을 품고 자주 반란을 일으켜 이주씨의 두통거리였다. 고환은 이들을 자기에게 배속시키면 해결하겠다고 제안했다. 고환은 드디어 이들을 데리고 하북으로 취식을 떠난다는 명목으로 동방 평원지역으로 이동했다. 531년 1월 신도(信都:冀州)에 도착한 고환은 이주씨 타도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는 이곳에서 지방세력인 한인(漢人)호족들과 연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음지변 이후 한인들은 모두 이주씨 세력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한인 호족들이 고환과 제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531년 이주씨를 격파한 고환은 업을 점거하고는 이곳에 대승상부를 두고 효무제(孝武帝 r.532∼534:元脩)를 낙양에서 추대했다. 고환은 다시 진양을 점령하고는 대승상부를 그곳으로 이동했다. 효무제는 원래 고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효무제는 534년 우문태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그가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관중으로 서분(西奔)했다. 고환은 그를 추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대신 효정제(孝靜帝 r.534∼550, 元善見)를 세웠다. 이로써 동위가 성립되었다. 곧이어 우문태는 효무제를 중심으로 서위를 세우게 됨으로써 화북은 동서 2개 정권으로 양분되었다. 2개의 과도정권이 성립된 셈이다. 고환은 당시 수도였던 낙양이, 적대국인 서방의 서위와 남방 양(梁)의 국경으로부터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업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제까지 다소 장황하게 우문호 모자가 이산가족이 된 과정과 당시 화북이 두개의 정권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우문태가 서위에서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은 549년 이후 우문호는 하동(河東:현 산서성 서남부지역)에 주로 근무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억류되어 있는 북제의 진양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가 자진해서 그곳에 근무하기를 원하였는지 아니면 당시 내륙 최대의 소금산지(현재도 소금을 대량생산하는 鹽池가 있다)로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이곳을 당시 우문씨의 거점으로 성장시키려는 우문태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우문호가 정권을 장악한 후 자신을 진국공(晉國公)으로 명명하였던 것은 그의 주된 근거지가 하동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문호는 북제와의 전선에서 근무하는 동안 어머니 염씨와 친척들의 소식을 백방으로 탐문했으나 허사였다. 특히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고 온 그의 아내에 대한 우문호의 태도였지만 그 점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사료를 아직 찾지 못했다. 당시 그의 권력만으로는 어머니의 생사나 안부를 확인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양국관계란 적대국의 한 유력자의 어머니의 안부까지 챙겨 알려 줄 만큼 인간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득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모자간의 연결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양국과는 상관없는 북방의 새로운 강자 돌궐(突厥)의 출현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양국의 위정자들로 하여금 가장 인도적인 것처럼 가면을 쓰게 만든 것은 북주·북제 당사자가 아니라 바로 돌궐이었던 것이다. 모자의 상봉은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간의 철저한 이해득실의 계산에 기초한 외교전의 결과물이었다. 거기에는 오랜 협상과정이 가로놓여 있었다. 어머니의 생존 소식을 전해 들은 우문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35년의 세월보다 송환협상이 진행된 몇년간이 더 피말리는 세월이었을 것이다.
주변국을 이용하려 한 나라는 동방의 동위와 북제였다. 북위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면서 외교적 권위를 승계한 동위는 북방의 유연(柔然), 남조의 양, 서방의 토욕혼(吐谷渾) 등 서위의 주변국들과 연계하여 서위를 포위 압박하려 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대처하기 위해 분주하던 서위는 당시 알타이 산지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한 후 점차 막북(漠北)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돌궐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유연이 북방의 지는 태양이라면 돌궐은 떠오르는 태양이었기 때문이었다. 돌궐은 551년 유연 가한(可汗) 아나괴(阿那爛)를 격파하여 이듬해 그를 자살시키더니 556년 유연을 완전 붕괴시킨다. 대유목제국으로 등장한 돌궐은 유연 붕괴 이후 주로 서방으로 그 발전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562년 주요한 경략 대상이던 헤프탈 원정을 대충 마무리한다. 제국 내부에서도 서돌궐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소극적이었던 동방으로의 확장에 치중하게 되었다. 국제관계가 점차 북제에 불리하게 전개된 것이다.
북주는 창업 후 곧 돌궐과 화친을 맺고 동쪽의 숙적인 고씨(高氏)의 북제 세력을 도모하려 하였다. 바로 그해 주국(柱國)인 양충(楊忠:후에 수나라를 창업하는 文帝 楊堅의 부)을 보내 돌궐과 연합군을 편성해 남북으로 협격하여 동벌(東伐)에 나선다. 북제의 장성(長城)을 부수고 그들의 본 근거지였던 병주(幷州:현재 太原일대)까지 진출했다가 돌아갔다. 일종의 연합군의 실체를 시위한 것이었다. 철군하면서 다시 재침할 것을 공언하니 북제로서는 두 연합군이 매우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宇文護 모자 상봉은 이해득실 따진 외교의 결과물

돌궐의 지원을 얻어 일거에 북제를 공략하려는 북주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서는 당시 북주의 최고 권력자였던 우문호의 어머니가 최고의 소재였다. 우문호의 어머니 염희와 당시 황제의 넷째 고모와 척족들이 아직 북제에 유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문호는 재상이 된 후 매번 밀사를 보내 어머니를 송환하려 애썼지만 생사마저 들려주지 않았던 북제였다. 북제는 이제 마지못해 북주 황친들을 돌려보내기로 하고 화친 교섭에 나섰다. 우선 황고(皇姑)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실제적인 북주의 집정자인 우문호의 어머니만은 돌려보내지 않고 후일의 큰 몫을 기대한 것이다.
북제측은 염씨가 우문호에게 주는 편지를 만들어 보냈다. 모자간의 애타는 정리에 더욱 불을 지르게 한 것이다. 염씨로부터 우문호에게 보내진 편지는 염씨의 자필이 아니고 북제측 사람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그가 구술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외교상의 교섭과 거래를 위해서는 그 내용의 정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동란 가운데 살아왔던 우문씨 일가의 운명이 여성다운 필치로 간결하면서도 애절하게 서술되어 있다.

“하늘과 땅이 나뉘고, 아들과 어미가 다른 곳에 살게 된 지 어언 30여년 동안이나 죽고 사는 소식마저 끊어져 있으니 간장의 아픔을 참을 수 없구나. 너도 슬퍼하는 마음을 다시 어디 안정시킬 만한 곳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스스로 되돌아보니 열아홉에 너희 집에 시집와 이제 80이 넘었다. 엄청난 난리를 만나 갖가지 위험과 곤란을 다 겪었다. 너희들이 장성하여 하루만이라도 안락한 날을 얻을 수 있기를 항상 바라마지 않았다. 무슨 죄가 이다지 무거워 이렇게 죽고 살고 나뉘어 이별하여 살게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느냐? 내 너희들 3남3녀를 낳았으나 이제 눈 앞에 한 사람도 볼 수 없구나. 말이 여기에 미침에 슬픔이 뼈를 에고 살을 도려내는 듯하구나. 제(北齊)나라의 은휼(恩适)에 기대어 그나마 노년을 다소 편안하게 보내고 있다. 또 너희 양씨(楊氏) 고모와 숙모 흘간(紇干), 형수 유씨, 그리고 너의 신부(新婦) 등이 같이 사니 또한 자못 자적할 수 있다. 그러나 약간의 귓병이 있어서 큰소리를 질러야만 들을 수 있다. 움직이고 먹는 것에는 다행히 큰 근심이 없다. 이제 대제(大齊)의 성덕을 널리 입은 데다 특별히 커다란 자비를 내리니 이미 내가 너희에게 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또 그에 앞서 소식을 너에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슬픔을 환하게 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곧 어짐이 가져다 준 조화(仁邸造化)라 할 것이니 장차 무엇으로 그 은덕에 보답할 수 있으랴!

내가 너와 헤어질 때 너의 나이가 어려 이전에 일어난 집안 일을 자세하게 알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옛날 무천진(武川鎭)에서 너희 형제를 낳았는데 큰 놈은 쥐해(508)에, 둘째는 토끼해(511)에, 너는 뱀해(513)에 낳았다. 선우수례(鮮于修禮)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우리 가족 모두 박릉군(博陵郡:定州)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좌인성으로 가고자 하여 당하(唐河)의 북쪽에 이르렀을 때 정주(定州) 관군에 패하여 너희 할아버지(宇文肱)와 두 숙부(宇文連+?)가 모두 전사하였다. 너희 숙모 하발(賀拔) 및 그 아들 원보(元寶), 너희 숙모 흘간 및 그 아들 보리(菩提) 그리고 나와 너 여섯이 같이 잡혀 정주성으로 끌려갔다. 얼마 후 나와 너는 원보장(元寶掌:北魏 宗室)에게 보내졌다. (너희 숙모인) 하발, 흘간과는 각기 헤어졌다. 보장이 너를 보고 ‘나는 너의 조부를 알고 있는데 그 형상과 비슷하구나’라 했다. 그때 보장의 군영은 당성(唐城:定州 中山郡 唐縣城) 내에 있었다. 3일을 머무른 후 보장이 약탈해 온 남부(男夫) 부녀 대략 60~70인을 모두 서울로 송치했다. 나는 그때 너와 같이 송환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정주성 남에 이르러 동향인 희고근(姬庫根)의 집에서 야숙하였다. 여여(茹茹:柔然)인 노예가 선우수례의 군영의 불을 바라보고는 나에게 ‘나는 지금 본군(本軍)을 향해 도망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군영에 이르러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이튿날 일출 무렵 너희 숙부(宇文洛生 혹은 宇文泰)가 병을 이끌고 와서 너와 나를 빼앗아 가니 다시 군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너의 나이 열두살 때의 일로 우리 모두 말을 타고 군대를 따라갔는데 아마 너는 이 일의 경과를 잘 기억할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후에 나는 너와 함께 수양(受陽:太原郡 壽陽縣)에 살았다. 그때 원보, 보리 그리고 너희 고모 아들 하란성락(賀蘭盛洛:賀蘭祥)과 너 4명이 같이 공부했다. 선생인 박사는 성이 성(成)씨였는데 사람됨이 독하고 악하여 너희들 4명을 가해하려 하였다. 나와 너희 숙모 등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각기 자기 애를 데리고 와서 때렸다. 성락만은 엄마가 없어 맞지 않았다. 그후 이주천주대장군(爾朱天柱大將軍:爾朱榮)이 망한 해(530)에 하발아두니(賀拔阿斗泥:賀拔岳)가 관서(關西)에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 가속들을 맞아들였다. 그 때 너희 숙부 또한 하인 내부(來富)를 보내어 너와 성락 등을 데리고 갔다. 너는 그때 비릉포(緋綾袍)를 입고 은장대(銀裝帶)를 하고 성락은 자색으로 짜서 염색무늬가 있는 통신포(通身袍:두루마기)와 황색비단 속옷(黃綾裏)를 입고 같이 나귀(啞)를 타고 갔다. 성락은 너보다 작아 너희들 세 사람은 모두 나를 ‘아마돈’(阿鰻)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일을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이제 또 너에게 어릴 때 입던 금포(錦袍) 껍데기 하나를 보내니 도착하거든 의당 검사해 보고 몇십년 동안 쌓인 나의 슬픔을 가늠해 주기 바란다.

천년만에나 찾아올 운수를 만나고 늙은이를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열어주는 대제(大齊)의 은덕을 입어 이제 서로 만나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죽은 시체도 썩지 않은 것 같은데, 하물며 지금처럼 살아있음에랴! 필시 우리는 이제 같이 모여 살게 될 것이다. 금수와 초목도 모자가 서로 의지하는데 나는 무슨 죄가 있어서 너와 나뉘어 있어야 하였던가? (낙담)하다가 이제 다시 무슨 복이 있어 돌아가 너를 만나 볼 희망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자면 죽었다 다시 소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 있다는 것은 구하면 다 얻어지는 법인데 어미와 아들이 다른 나라에 속해 있으니 어느 곳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사 너의 귀함이 왕공(王公)을 넘어서고 부함이 산해(山海)를 넘친다고 하여도 80여세나 되는 노모 하나가 표연히 천리나 떨어져 죽음이 아침 저녁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한나절이라도 잠시 볼 수 없고, 하루라도 같은 곳에 있을 수 없으며, 추워도 네가 주는 옷을 얻을 수 없고, 배고파도 네가 주는 음식을 얻을 수 없으니 네가 비록 영화가 극성하여 빛남이 세상을 다 비춘다 해도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나에게 무슨 보탬이 된다는 말이냐? 오늘 이전에는 네가 이미 나에게 공양을 펼 수 없었으니 지나간 일을 따져 무엇하리. 오늘 이후 나의 남아 있는 목숨은 오직 너에게 걸려 있다. 위에는 하늘을 이고 아래로는 땅을 밟고 살아가며 그 사이에는 귀신이 있으니 멀리 어두운 곳에 살고 있다고 하여 나를 속일 수 있다고 말하지는 말아라.

너의 양씨 고모는 이제 비록 염서(炎暑)이지만 먼저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관문이 막고 황하가 길을 끊어 오랫동안 우리를 나누어 놓았다. 편지글을 일반형식으로 쓰게 되면 너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 이런 까닭으로 경우마다 실제의 증거를 대고 아울러 내 성과 이름을 썼다. 당연히 이 이치를 알아서 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北齊의 최대 협상카드는 宇文護 모친의 서신

이 편지를 받고 ‘본래 효성이 지극했던 우문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그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면 북제 정권의 이산된 모자관계를 이용하려는 책략이 얼마나 교묘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곤 한다. 80세가 넘은 노모와 50대의 막내아들, 어쩌면 그들의 처지가 필자의 경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86세인 어머니는 2년 전부터 갑자기 큰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로 안부를 묻고는 하지만 전화 거는 사람이 막내아들임을 확인시키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1,000리라 하나 비행기를 타면 1시간 거리에 불과한데도 1년에 두세번 찾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우문호가 어머니에게 보낸 답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세상이 나뉘고 재화(災禍)를 우연히 만나(어머니의) 슬하를 떠난 지 어언 35년이 되었습니다. 몸을 만들어 주시고 기를 갖게 한 사이가 모자관계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어느 누가 저 살보(薩保)와 같이 이처럼 불효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랜 재앙과 쌓이고 쌓인 뒤틀림이 오직 저에게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응보의 그물이 위로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걸리게 하였단 말입니까? 단지 몸을 세우고 행위를 세우는 데 하나의 어긋남이 없다면 식견을 가진 밝은 신령께서 마땅히 애련하게 볼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공후(公侯)가 되고 어머니는 부예(層隸)가 되었으니 더워도 어머니가 더워하는 줄 모르고, 추워도 어머니가 추워하는 줄 모르며 옷도 있는지 없는지, 배를 골는지 배불리 먹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 밖에 있는 것처럼 잠시라도 그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슬피 울어 피눈물을 쏟아내어도 분단의 아픔은 원한이 되어 이 일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갈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죽어서 그 소식을 알 수 있다면 황천에서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제나라 조정에서 그물을 걷고 은혜롭게 덕음(德音)을 주어 마돈(鰻·어머니라는 선비어)과 네 고모를 모두 긍휼히 여겨 풀어준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처음 이런 뜻을 전해 듣고는 혼이 넘고 날아가 하늘을 우러러 소리지르고 땅에 머리를 쳤을 정도로 저 자신을 자제할 수 없었습니다.

네 고모께서는 바로 정중한 송환 절차에 따라 편안하게 국경을 넘어 이달 18일 하동(河東)에서 만나 뵈올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 얼굴색을 뵈옵고는 저의 간장이 무너지는 듯 박동쳤습니다. 그러나 (고모님들은) 다년간 떨어져 살아온지라 죽고 살아온 소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서로 처음 만났을 때 입에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고 오직 제나라 조정의 관대함과 너른 마음만을 말하고 제나라가 얼마나 큰 덕을 베풀었는지만을 말할 뿐이었습니다. 마돈께서 비록 궁금(宮禁)에 계시지만 항상 특별대우를 받고 있고 특히 이번에 업(橙)으로 와서 은혜로운 대접을 더욱 융숭하게 받고 있다고 말하여 주었습니다.(제나라 조정이 저를) 긍휼하고 애처롭게 여겨 마돈으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게 허락해 줌으로써 슬픔과 아픔을 곡진히 하고 가사를 갖추어 상세히 말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읽기를 끝내기 전에 오정(五情)이 칼로 잘린 듯하였습니다. 편지 속에서 하신 말씀 어찌 감히 잊을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마돈께서 나이가 많으신 데다 근심과 아픔마저 더해 잠자리도 편하지 못하고 잡수시는 것도 거르는 일이 자주일 것이라 매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을 엎드려 받드니 점차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행복합니다. 향리가 파패(破敗)하는 날, 살보의 나이 이미 10여세라 고향의 옛일을 스스로 기억해 낼 수 있는데, 하물며 가문의 화난과 친척의 유리(流離) 사실을 잊을 리 있겠습니까? 헤어질 전후 시기에 주신 자애로운 가르침은 살과 뼈에 새겨져 있고 마음 속을 항상 휘감고 있습니다.

하늘이 상란(喪亂)을 키우고 사해(四海)마저 이리저리 멋대로 흘러갔습니다. 태조(太祖:宇文泰)가 때를 타고 제나라 역시 운수를 좇아 양하(兩河:東河와 西河 즉 冀州의 땅이니 北齊)와 삼보(三輔:北周)에서 각각 신기(神機)를 만났습니다. 그 사적을 되짚어 보면 서로 저버리고 배신한 바가 없습니다. 태조가 승하하고 하늘의 보호(天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을 때에 살보가 조카들의 연장에 속하므로 친히 고명(顧命)을 받았습니다. 비록 몸은 무거운 임무를 지고 있으나 직위상 근심과 책임이 큽니다. 세시를 맞아 경축할 때에 이르러 자손들이 모두 뜰에 모이면 돌아봄이 슬프기 그지없고 가슴이 끊어지는 듯하니 무슨 얼굴로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신명 앞에 이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제나라가 단비와 같은 은혜로 대지를 이미 촉촉히 적셔 주셨으니 사랑하고 경애하는 지극한 마음이 옆 사람에게도 베풀어졌습니다. 초목도 마음이 있고 금수나 물고기도 은택을 느끼는데 하물며 사람 사이에야 그 뜻을 받들고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과 나라를 가진 자는 신의를 근본으로 삼으니 삼가 생각건대 머지않은 어느 날 응당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뵐 수만 있다면 영원히 바라온 필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고 뼈에 살을 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런 은혜를 능가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산(山)을 등에 지고 악(岳)을 머리에 인다 해도 이 은혜보다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두 나라가 나뉘고 떨어져 있으니 당연히 서신 왕래가 있을 수 없는 법인데 주상(主上)께서 제(北齊) 조정의 자식과 어미의 관계를 끊지 않으려는 은혜를 감안하시어 역시 답장을 쓸 것을 허락하시었습니다. 오늘 문득 집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니 종이에 엎드려 소리 높여 울 뿐 말로써 저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별할 때 남겨 두었던 금포(錦袍)껍데기를 보내주셔서 그것을 받으니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완연히 알아 볼 수 있어 그것을 안고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삼가 뵈올 수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참는 일 외에 다시 무슨 다른 마음을 갖겠습니까?”

北齊가 대신 작성한 모친의 서신 읽고 오열한 宇文護

위 편지를 보면 한 국가 권력자의 편지로는 매우 굴욕적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이 북한을 대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이토록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송환협상을 진행시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제나라는 우문호의 어머니를 곧장 보내지 않았다. 다시 그 어머니로 하여금 우문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하고 우문호의 답신을 요구하였다. 서로 편지가 오고가기를 수차례나 했으나 그 어미는 쉽게 북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제로서는 이용가치가 큰 우문호의 어머니를 최대한 이용할 만큼 이용하려 한 것이다. 북제측의 늑장부리기로 송환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북주 조정에서는 제나라가 국제적 신의를 잃었다고 판단하여 사신에게 최후통첩성 국서(國書)를 가져가게 하였다.

“대저 의리가 있으면 존속할 수 있고 신의가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의에 비해 산악(山岳)은 가벼운 것이며 무기나 양식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原과의) 서약을 어기지 않았으니 중이(重耳:晉文公)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左傳” 僖公 25년조), (제사 지내는 神官인) 축사(祝史)가 읽는 제문에 (신에게 말해도) 부끄러운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 수회(隨會:范武子·士會)가 진나라의 회맹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左傳” 襄公 27년조) 백성을 사목(司牧)하는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린 사람 가운데 의리를 잊어버리고 식언을 많이 하는 자가 아직 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주의 수가 (“易經”에 나오는) 돈(屯)과 명이(明夷)로 속하게 되고, 시(時)가 나뉘어 구분된 때 이래로 황가 친척의 (타국에) 윤함(淪陷)됨이 거듭되어 왔습니다. 인자한 고모님, 세모(世母 :어머니)님 등, 살아 돌아올 희망을 포기하신 분들을 그대 조정에서 지난 초여름 마침 덕음을 펴 이미 인자하신 고모는 송환되셨고, 세모도 귀환시키기로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번잡함과 더위를 핑계로 다가오는 가을에 세모를 송환하기로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의가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였고, 선한 말은 절대 거짓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떨어지는 나뭇잎이 계절을 알리고 얼음과 서리의 계절이 곧 닥칠 것 같은데 세모를 두고 거짓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 귀환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하지 않고 다시 우리에게 어떤 보답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자와 옥(玉)과 백(帛)도 이미 소용되는 것이 아니며, 국경을 보존하고 백성을 안녕하게 하는 것도 또 보답이 아니라고 그대들은 말합니다. 이 뜻을 깊이 살펴보면 본래의 의도와 전적으로 어그러진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예로서 해야 하거늘 어찌 잠시의 응변에 급급한다는 말입니까? 아들에게는 성의를 다하라 하고, 친척들에게는 보답을 끈질지게 요구하는 것은 실로 평화 분위기를 해치는 것이며 하늘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北周)나라 왕실은 태조의 천하인데 개인의 집안 일을 돌아보기 위해 어찌 국가에 손해를 입힐 수 있으며,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실질을 훼손시킬 수 있겠습니까? 기른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을 일러 인자라고 합니다. 엎드려 북을 치고 무기를 감추는 것(휴전을 논의하여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사려깊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대들이 척촌(尺寸)의 땅을 다투고 양자가 사소한 일로 송곳과 칼을 겨누게 되어(趙나라의) 장평(長平)이 무너지고 흔들리게 되면 조나라가 둘로 나뉘고, 병사를 함곡관(函谷關) 밖으로 나가도록 하면 곧 한(韓)나라가 찢어져 셋으로 된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그대가 온전함을 얻을 수 있겠으며 손익에 차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총재(大催宰)는 그 지위가 장상(長相)을 겸하고 그의 감정에 따라 종실과 나라가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슬픔이 피를 삼키는 듯하니, 이산되어 있다는 사실도 죽어서 한으로 남을 것인데,(어머니가 아들을 찾아) 손가락을 물어뜯으면(아들은) 곧 달려가야 하고, (어머니가) 문에 기대고 있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들의 도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시작만 헛되이 듣고, 좋은 결과는 끝내 듣지 못하였으니 수많은 관료들이 놀라 떨고 삼군(三軍:御軍)이 노하고 실망하고 있습니다. 효자가 될 수 없다면 당연히 충신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지난해 북군(北軍:突厥)이 그대의 국경에 깊이 들어가 성 밑에서 수많은 포로를 데려왔습니다. 비록 군사를 철수시켰으나 나머지 공을 아직 거두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제 이 말머리를 남으로 향하여 다시 쳐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진(晉)나라 사람이 각(角)을 불면 우리도(연합 결성에) 화답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북제의) 도로에는 이미 계엄령이 내려져 있고, 북방(돌궐)을 막을 뿐만 아니라 또 남방(북주)도 공략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스스로 군대를 보내어 우리와 대적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원하는 바 그것입니다. 성 안에서 농성만 한다면 적을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내일 이른 새벽까지 만나기를 원하면 그대를 위하여 주선할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도 끝이 좋지 못하면 원한만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태만히 하지 않는 것은 니부(尼父:孔子)의 가르침이며, 궁박한 노인을 궁휼히 여기시는 것은 주(周) 문왕(文王)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억류를 계속할 것이냐 송환할 것이냐의 권리 행사는 두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깊이 생각했다면 나의 생각과 어찌 이런 격차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이 편지는 바로 선전포고였다. 이 편지를 보내는 우문호의 심정이 쉽게 가슴에 다가온다.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인 보정(保定) 4년(564) 9월, 북제는 우문호의 어머니를 송환했고 그가 장안에 도착함으로써 한 권력자의 어머니를 두고 일어났던 양 적대국가의 교섭은 끝났다. 편지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북제측은 염희라는 외교상의 호재를 두고 수많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요즈음 북한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북주측도 그 요구에 줄곧 응할 수밖에 없었다. 우문호는 돌궐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북제를 쳤으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북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원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는 자도 있다.

北周, 돌궐 연합군과 北齊 정벌시 소극적 대처

우문호가 그의 어머니와 헤어진 곳은 진양, 즉 현재의 태원이다. 그리고 염희가 양국 외교의 흥정거리가 되었던 때에는 업도(橙都)에 감금되어 있었다. 우문호가 북주 정계의 중심에 서서 조정을 장악했을 때는 장안에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모곡을 불렀던 곳은 그의 임지였던 하동 지역이었다. 하동이라 하나 당시의 국경이 산서성 가운데 남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근무했던 곳은 현재의 운성(運城) 지역이다. 그러나 이상의 지역들에서 우문호 모자의 이 애달픈 이산에 얽힌 사연을 말해주는 유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나는 우문호에 관심을 가진 이후 몇차례 이들 지역을 답사했다. 답사 때마다 이 모자에 얽힌 현장을 찾으려 했으나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지금부터 1,400여년 전 어느 권력자, 그것도 결국 나중에 그의 조카 무제(武帝:宇文邕)에게 피살된 이민족 출신의 우문호의 사모곡에 얽힌 장소를 보존할 정도로 여유를 부릴 중국인들이 아니다. 인걸은 종적없이 사라졌으나 산천은 그대로다. 특히 업도(河北省 臨仰縣)와 태원 그리고 하동 지역은 기차에서 차창을 통해 그 산천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산천은 아직도 그 옛날의 두 모자를 상상하기에 족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복사한 우문호의 열전을 가지고 간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말없는 산천과 아득한 옛날 한 옛날의 흘러간 사연이지만 이 모자에 얽힌 글을 읽고 있노라면 우문호 모자가 흘린 눈물과 한숨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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